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단단 Mar 21. 2024

낮말은 아이들이 듣고, 밤말도 아이들이 듣는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어디든지 날아간다. 그리고 그 말들은, 마음속에 고이 담겨 멀고 먼 초등학교 교실까지 흘러들어오곤 한다순수하고, 격의 없고, 어른을 신뢰하는 특성을 가진 보통의 아이들은 종종 그 말뭉치들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속닥속닥 혹은 거침없이, 무의식인 듯 혹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그 말들은 듣는 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그리고 이따금씩, 한껏 억세진 어른들의 마음을 슬그머니 흔들어 놓고는 한다. 







한산한 읍지역 소재에 있던 우리 학교는 전학생을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무척이나 더웠던 그 해 여름날, 느닷없이 4남매가 전학을 왔다. 그것도 저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서 말이다. 


4남매는 한국 국적이었는데 부모님의 직장문제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한국에 정착해 살 계획이라고 했다. 그중 6학년인 정화가 우리 반이 되었다. 처음 본 정화의 첫인상은 '앞머리가 저렇게 길면, 앞이 보일까?'라는 질문이 불현듯 생각날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그림자 진 얼굴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정화는 말수가 없는 편이었는데,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정화의 모국어는 일본어에 좀 더 가까웠다. 한국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거의 하지 못했다. 교과서 속 글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니, 수업과 평가가 될 리 만무했다. 방과 후에 정화를 남겨 정규시간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수학 교과서를 끝까지 풀고 가게 하는 것이 그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도 정화는 처음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적응을 잘했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소통은 한계가 있었고, 주로 담임교사인 나를 의지하곤 했다. 나는 평소에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안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정화를 혼자 두기에도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오후, 평소처럼 방과 후에 남아 문제를 풀고 있던 정화가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 


"선생님은 여기서 버스 타고 5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살아"



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에 나도 정화에게 질문을 건넸다. 



"정화야, 일본에 사는 것 좋았어?"


"네"


"일본 어디 살았어?"


"교토요"


"그렇구나, 이제 한국에서 쭉 사는 거야?"



"네, 집에 땡전 한 푼도 없어서, 일본에서 못 살아요"




정화는 수학 문제를 풀며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땡전 한 푼'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열세 살 아이의 입에서, 많고 많은 표현 중에 굳이 '땡전 한 푼'이라니. 아이가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낸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에선가 들려 저장돼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이런 일은 여러 번 생겼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정화가 가져와야 할 서류들이 있었는데, 주양육자인 아버지가 일 때문에 바빠서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기한 내에 챙겨 보내지도 않았다. 학년 전체가 일괄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라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정화야, 선생님이 말한 서류, 종이 있지? 내일까지는 꼭 가져와야 하는데"


"아, 그거 아빠한테 말했는데 해주시겠대요"


"그래, 근데 정화야 집에 엄마도 계시지?"


"네"


"이거 엄마가 대신해 주셔도 되거든, 아빠 바쁘시면 한번 말씀드려 볼래?"



"엄마는 게을러가지고 말해도 소용없대요" 


                     


정화의 입에서는 아빠의 언어로 추정되는 단어가 나왔다. 다른 6학년 학생이었으면 그런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이 무안한 일임을 알고, 순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말이 아직 서툰 정화는 곧이곧대로 집에서의 말들을 교실로 옮겼다. 


지도를 하기도 참 애매했다. '게으르다'는 부정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는 뜻만 넌지시 알려주고 서둘러 대화를 마쳤다. 정화에게 서류를 받기까지는 이틀이 더 걸렸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잘 듣고, 잘 기억한다. 아이의 눈을 맞추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닐지라도 어디선가 들려온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거름망이 없어서, 말의 불필요한 찌꺼기들을 걸러낼 재주가 없다. 자연스레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의 '그냥 한 말' 내지는 '감정적으로 내뱉어진 말'이 어떤 아이들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한마디가 되는 걸지도 모른다



지예는 학기 초에 적는 설문지에 가족에게 가장 바라는 점으로 '부모님이 자신 앞에서 싸우지 않고,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라고 적어냈다. 낯빛이 어둡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던 지예는 무기력증이 심해 교내 위클래스 상담을 받기도 했다. 모든 가정은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을 테고, 부모도 아이가 들을 줄 모르고 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말일지라도 아이가 직접 듣게 되었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지예가 부모의 사정을 존중하기엔 아직 어렸다. 


반복적인 일탈행동을 일삼았던 진서는 '엄마가 저 18살 때 낳았는데 저 없애자고 했대요. 그런데 외할머니가 자기가 키운다고 해서 낳았대요'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할머니한테 말하는 거 들었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열세 살 아이가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야기하던 진서의 모습이 아직도 어른거린다. 진서가 이전에는 어떤 말을 들어왔을까, 그리고 어떤 감정을 삼켜왔을까. 어떤 말은 아이들에게 비수로 꽂혀 가슴에 큰 생채기를 남긴다.


아버지 손에서 길러지던 준원이는 저학년 때 '너 못 키우겠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 고모집으로 입양됐다고 했다. 준원이의 고모가 아이의 행동을 변호하며 직접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학교에 있을 때 다소 방어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아이들과 부딪히지 않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준원이가 이미 받아버렸을 마음의 충격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그리고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세계 공통, 불변의 진리인데 가끔 우리는 청자가 아이들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곤 한다.  


아이들은 스펀지같이 말을 빨아들이고, 거르지 못해 그 말들을 마음속에 고이 저장한다. 그리고 종종 그 사실을 인생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힘겨워한다. 기껏해야 십년 조금 넘게 인생을 경험한 아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욱해서 나도 모르게 한 말인데'


'아이가 들을 줄 몰랐는데'



결코 성인군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른이니까. 좀 더 살았으니까. 아이들이 들어도 되는 말과 아닌 말을 구분할 줄 아니까. 


가만히 있어도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마냥 천진난만할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마음에 최소한의 보호막이 씌워지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