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겁을 내며 살아온 교사와 고집스럽고 자기애가 강한 열두 살 아이들이 똘똘 뭉쳐 있는 5학년 교실에서는 자주 이런 대화가 들려온다.
웬만하면 고학년 담임을 선호하는 나는 매년 3월이 되면 스무 명에서 스물여섯 명 사이의 아이들을 새롭게 만난다. 지지고 볶으며 일 년을 꾸려가야 하는 숙명 앞에서 어떤 기질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한데, 일례로 네 번 연속 6학년 담임을 했을 때 돼지띠, 쥐띠, 소띠, 호랑이띠 아이들(편의상 띠로 구별했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매해 천차만별이었다. 예를 들면,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들이 많아 일 년 내내 절에 온 듯 고요하게 지낼 때가 있는가 하면, 텐션이 천장을 뚫을 듯 높아 방방 뛰는 분위기가 자동으로 만들어질 때가 있달까.
이러면 이래서 좋고 저러면 저래서 좋고. 반 분위기는 일장일단이 있으니 크게 개의치는 않지만 유독 그 해 5학년 아이들은 고집이 세고, 겁이 없고 거침이 없었다. 주로 무엇에 거침이 없었느냐 하면 바로 '한번 해보는 것'에 대해서다. 시간이 흐르고 한 발짝 뒤에서 그때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도전과 변화보다는 안정과 유지가 좀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치관에 파장을 던지곤 했던 그때 아이들의 침착한 눈동자와 꼿꼿한 자세, 단단한 힘이 서린 목소리. 그게 바로 '용기'였다는 것을 요즘 깨닫는다.
그 해의 에피소드 중 하나가 떠오른다.
윤채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전국에서 흔히 보기 힘든 특성화부가 하나 있었다. 합주부였는데 보통 서양악기로 오케스트라를 하거나 국악기로 사물놀이부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여러 종류의 타악기로만 구성된 독특한 부서였다.
학교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베테랑인 강사선생님께서 퀄리티 높은 수업을 진행해 주시는 것에 비해 아이들의 큰 관심을 끌기 어려웠는데,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악기들과 생각보다 많은 연습량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음악을 좋아해야 하고 계이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컸다.
유달리 그 해 합주부를 하겠다는 아이들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시간과 노력이 드는 부분이다 보니 함부로 추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추가모집까지 해보고 정 없으면 없는 대로 꾸려가야겠다 생각하던 순간, 윤채가 찾아왔다. 활기차고 짓궂었던 평소의 모습에 비해 쭈뼛쭈뼛 거리는 모습이었다.
"선생님, 그 합주부요. 저 신청해도 되나요?"
"어, 좋지! 윤채 악보 볼 줄 알지?"
"저.. 아니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알긴 아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제가 피아노학원 같은 데는 안 다녀봐서요"
"부모님한테도 하겠다고 말씀드렸어?"
"네, 엄마가 저 악보도 잘 모르는데 가서 할 수 있겠냐고.. 근데 선생님께 한번 여쭤보라셔서요"
반가웠지만 난감했다. 기본적인 계이름과 음표, 쉼표는 볼 줄 알아야 수업이 원활히 진행된다고 했던 강사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괜히 시작했다가 음악을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뒤처지면 어떡하나, 중간에 포기하면 곤란한데. 걱정도 살짝 들었다.
".. 그런데 배우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한번 해보고 싶어요. 오늘 집 가서 오디션 영상 보낼게요"
애매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윤채는 재빨리 덧붙였다. 일단 영상을 보내라고 말한 뒤 윤채를 돌려보냈다. 오디션은 각자 자신 있는 악기로 자유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찍은 뒤 선생님께 제출하는 것이었다. 보통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취미로 배우고 있는 악기로 영상을 찍어 보냈다. 윤채는 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듯한 교과서곡 하나를 리코더로 연주하는 장면을 찍어 보냈는데, 조금 어설프지만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계이름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참가인원이 적었던 탓에 윤채는 큰 경쟁 없이 합주부의 단원이 되었다. 윤채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학원 시간도 부모님이 바꿔주셨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첫 수업이 끝난 다음 날, 윤채를 불러 물었다.
"윤채야, 어제 어땠어?"
"재밌었어요!"
"어렵진 않았어?"
"어려웠어요. 다른 애들은 빨리 잘 따라 해요."
"그래도 계속할 수 있겠어?"
"네! 해보려고요. 악기연주 같은 거 해보고 싶었어요."
남들이 잘하는 것을 어찌하냐는 듯,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서 그저 좋다는 윤채는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윤채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가끔은 점심시간도 반납해 가며 합주 연습에 진심으로 참여했다.
"윤채야, 요즘 잘하고 있어?"
"계속 서있어서 다리 엄청 아파요. 그런데 선생님 저 좀 늘었어요!"
10월에 있던 지역 연주회에서 여느 때처럼 머리를 단정히 묶고 빳빳이 다려진 단복을 입은, 손에는악기 하나를 들고긴장감과 설렘이 공존하는 표정을 짓던 윤채가 떠오른다. 일 년 전 어리숙해 보이던 윤채는 그새 커있었다. 악보를 볼 줄 몰랐던 아이라고 상상도 되지 않았다.
"선생님, 엄청 떨렸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내년에는 언니오빠들 하는 다른 악기 할 거예요!"
연주회가 끝나고 함박웃음을 짓던 윤채는 내년에는 좀 더 어려운 악기를 해보고 싶다고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악보를 볼 줄 모르지만 꼭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윤채의 목소리와 눈빛,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한 리코더 연주가 윤채의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용기였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윤채가 합주부를 하며 어떤 고민과 노력을 했을지 헤아릴 순 없지만, 미지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를 통해 얻어낸 새로운 경험들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져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용기를 내는 것이 두려워진다. 특히 이제까지 걸어온 인생의 결과 완전히 다른 일을 선택하거나 도전하는 것이 어렵다. 아마 나이가 들어 점점 더 보이는 것도, 아는 것도 많아진 탓일 테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핑계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해본다. 보이는 것이 많아졌다는 뜻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됐다는 말은 아닐까. 누군가 나의 새로운 선택을 경솔하다며 비하하고, 혹여 실패했을 때의 모습을 비웃을까봐 지레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먹든 큰 관심도 없는 데 말이다.
또, 아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추측성 자기 확신이 아닐까. '나는 이제까지 제대로 못했으니 앞으로도 못할 거야'라는 생각들로 스스로를 판옵티콘에 가두어 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예외의 총체임에도 과거를 근거로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뭐 어때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쳇바퀴에서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삶, 도전과 변화를 경로 이탈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올라탄 쳇바퀴는 자신이 만든 쳇바퀴가 아닐 수 있다. 어릴 적 환경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의 흐름이 만든 '전형적 인간' 또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틀이 쳇바퀴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용기의 가치가 퇴화된 것은 아닐까. 마음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누구보다 '해보고 싶은', '용기내고 싶은'내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용기를 내고, 그 용기를 존중받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용기를 평가하지도, 평가받지도 않길 원한다.
결국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용기로 충만하다 못해 벅차디 벅찬 삶을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