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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당 May 10. 2022

대왕판교로엔 잿빛 바람이 불어

대학교 친구가 판교에서 스타트업을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이미 7년 차 CEO에 특허까지 있는 법인이었고 나는 그냥 월급쟁이 의사인데. 판교도 궁금하고 스타트업도 궁금하고 바람도 쐬고 싶고 해서 SRT에 몸을 얹었다.  


누가 몇 백억 있는 집 아가씨랑 결혼했고, 비트코인은 이러저러하고, 차는 포르쉐로 바꿨고, 장인어른이 집을 해줬고, 부수입은 얼마나 벌었고, 그래서 결혼은 조건 따져가며 무조건 돈 있는 집 만나야 하며 조건이 되지 않으면 만남조차 갖지 말고, 누구는 개원하고 투자해서 100억을 벌어서 FIRE 했고 - 이런 이야기들이 날 지치게 하고 내가 모자란 사람인가, 내 부모는 왜 내게 물려줄 건물이나 아파트 하나 없을까 원망을 많이 했다.


우울한 느낌은 겨울이 지나가도록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연애하겠다는데 뭐 그리 마음에 안 들어서 뒷목 잡고 쓰러져 입원할 일인가 했다. 뭐가 문제냐 했더니 그 집이 못 배우고 가난해서 아파트 하나 못해오는 게 문제라 했다. 다른 여자애들은 아파트 받고 차 받고 병원까지 받는데 너는 왜 병신같이 그 못 배우고 없는 집 남자를 만나냐 했다. 집안이 너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 했다. 주변 의사들 내버려 두고 그런 남자 택하는 네가 병신 머저리에 못 배운 년이라 했다. 아는 남자 의사들 중에 부모가 아들 인생에 참견하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되니 당신들같이 자식 인생이 당신들의 것이라 착각하는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다 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돈을 들였으니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 아니다. 결혼 또한 니 맘대로 해서는 안된다. 그 남자와 헤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너는 내 딸이 아니다. 돈 있으면 됐지 남자에게 뭘 더 바라냐. 넌 왜 참고 살려고 하지 않냐. 


어머니는 말했다.

내가 너를 잘난 년으로 키워서 이렇게 됐다. 내가 너를 가르치지 않고 대학교도 안 보냈더라면 얌전히 시집을 갔을 텐데.


우리 두 번 다시 보지 맙시다. 나는 당신들 자식 아닙니다. 말하고 집을 나가려 했다. 아버지는 술잔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나의 팔을 세게 쥐었고, 술잔을 쥔 오른손으로 나를 때리려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막아서고 나를 급히 작은 방으로 대피시켰다. 아버지는 쫓아와서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방에서 나가면 처맞을 줄 알아라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저년 눈깔 뜨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며 다시 나를 때리려 했다. 어머니는 나를 잡고 오열했다. 제발 그 남자와 헤어져달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진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내가 그와 헤어지고 다시 이 집안에 들어온들 당신들과 행복하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아파트도 재산도 받을 거 없으니 굳이 아는 척하고 지내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다. 지긋지긋하다. 밤 11시 나는 어머니와 집을 빠져나와 기차역으로 갔다. 아빠도 술에 취해서 그렇지 그게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조심히 들어가고 도착하면 카톡해- 하고 말한 뒤 그녀는 벤츠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나에게 한 행동이 그의 진심이 맞았을 거다. 


https://pixabay.com/images/id-78823/


소란이 일어난 작은방 옆에 또 다른 작은방에는 할머니가 지내고 계신다. 그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밖에 나와보지 않았다. 아마 안에서 기독교 방송을 보시면서 성경 필사를 하고 계셨을 거다. 


주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주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그 잘난 아들만이 그녀의 노후를 책임져주듯이, 그 잘난 아들 없이는 지낼 집도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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