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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꽃봉 Dec 06. 2023

유목민의 하루

부지런 떨어야 하는 삶

 가장 염려 됐던 건 그날 내가 묵을 곳을 직접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갈 곳이 있어야 쉽게 떠날 마음이 생길 텐데 '매일의 집'을 골라 가기란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순례하며 묵어야 할 알베르게들은 시설과 옵션에 따라 금액이 상이하다. 저렴한 공립의 경우 대부분 선착순으로 이뤄져 늦장을 부렸다가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거나 억지로 더 걸어야 한다. 운이 나쁘면 노숙자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거라고. 베테랑의 조언에 따르면, 초반 2-3일 정도는 예약을 해보고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판단 하에 조절해 보라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누군가 정해주려 하면 귀를 닫아버리는 나인데 이번만큼은 말 잘 듣는 학생이 된다.


 홀로 걷는 길에 심지어 초행길은 설렘과 겁이 함께 공존한다. 후회를 방관하지 않으려 계획하는 내 습관들이 여기서도 잘 유지되고 있다. 필수 예약제인 첫날의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를 이어 다음 목적지인 수비리(zubiri)마을의 알베르게도 미리 예약했다. (*예약은 부킹닷컴 어플로 쉽게 할 수 있다.) 이후엔 얼마나 걸을지 몰라 그때의 내게 맡기기로 하고 말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해야 할 일들은 어쩌면 현실(도시생활) 보다 더한 '부지런한 마음'이 필요하다. 언제든 누울 수 있는 폭신한 침구와 얼마든 갈아입을 수 있는 많은 옷가지들, 심지어 냉장고만 열면 갈증을 해소해 줄 물조차 이곳에선 당연하지 않다. 직접 누어야 할 곳에 이부자리를 펴야 하고, 내일 당장 입어야 할 옷을 위해 손 수 빨래를 해야 하며 내가 마실 물은 마을 식수대에서 직접 구해와야 했다.

 

새벽 길을 걷다 보면

 

 새벽하늘의 별들을 무척 좋았던 난, 동이 트기도 전 매일같이 눈을 떴다. 떠날 채비 후 대충 배를 채우고 걸으러 나섰다. 어두운 공기들과 하늘이 무서워도 별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덧 두려움은 사라져 있었다. 곧 태양이 뜨고 흩날리는 들판에게서 온 풋내음은 그 어떤 향수보다 안정감을 줬다. 걷다 만난 사람들과 부끄러운 영어 실력으로 시시콜콜 수다를 떨기도, 배고플 땐 그곳이 어디든 개의치 않고 배낭 옆에 꽂아둔 바게트를 뜯어먹기도 했다. 중간에 대형 마트를 만나면 이 무슨 횡재냐며 동행자 '레온틴'과 깔깔거리며 신나게 장도 봤다. '장보기'는 유일한 사치의 행복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목적지에 가까워질 즘엔 늘 지치기 마련이었는데, 오히려 이때의 발걸음은 초사이언의 힘을 발휘해 막강의 경보를 하기 일쑤였다.


수줍은 나의 날것 사진


 걸음을 마치면 옷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길 위에서 얻어 온 먼지들로 뒤덮인 옷과 살 사이의 끈적한 땀들은 한동안 식을 줄 모른다. 하나씩 벗을 때마다 그날의 고행을 내던지는 희열감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걷는 내내 묵혀온 이 잔여물들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비누 하나로 완벽하다. 샴푸와 린스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비누는 빨래에서도 빛을 발한다. 각 알베르게에 배치된 대야에 비눗물을 풀어 곁가지 옷들을 조물딱거리면 여간 개운할 수 없다. 탁해진 물이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일이라니. 내가 이렇게 빨래를 좋아했던가.


배정받은 침대. 매일의 똑같은 옷을 빨아야 하는 수고로움.
반가운 마트와 숙소에서 먹는 마트 식품들.


 빨래를 널고 다음 할 일은 제일 좋아하는 배 채우기였다. 대부분의 끼니는 마켓에서 사 온 것들. 오다 마트를 만나지 못했거나 그날 묵는 알베르게의 부엌 사용이 어렵다면 마을 있는 식당에 갈 때도 있었다. 특화된 순례코스가 있는 바르(bar)도 간혹 있는데, 가격이 꽤 저렴한 편이다.

 난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동네구경을 나선다. 오늘 지낼 마을은 대체 어떤 곳일까.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마을들 구경은 낯설어도 좀 있으면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효과가 있다. 잠시나마 그들이 돼 마을 구석을 비비며 현지인의 기분을 만끽하곤 했다. 한참 동안 충분한 여유를 즐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모르는 이유 또 하나가 스페인의 7-8월의 해는 밤 9시가 되어야 지기 시작하기 때문도 있다. 어떤 날은 멍 때리며 사색하다 져가는 해를 보고 숙소에 들어갔으나 잘 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내일의 옷을 입고 '깊은 숙면'이다.


 

 이곳의 유목민 생활은 걷는 것 외에 별 다를 바 없다. 일상에서 해온 습관들, 마음가짐은 내가 변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도 매한가지다. 바쁘게 움직인 만큼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만끽해야만 끝나는 하루. 하나 분명한 건 게으름을 인내할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이불을 펴야 잘 곳이 있고, 오늘 입은 옷을 빨아야 내일 입을 옷과 신을 양말이 있으며, 마실 물을 떠 와야 목을 축일 수 있는. 결국은 해내야 할 일을, 오늘을 충만히 보내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할 수 있겠다. 그렇지 못하면 내일을 마음껏 즐기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길 위의 유목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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