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어떻게든 자신을 남기고 싶어 하는 나는야 조용한 관종. 이번에도 기록할 '뭔가'를 해내야만 했다. 순조로운 준비는 아니었다. 막상 순례길을 결심했을 땐 될 대로 되어라였지만 떠나기 직전에서야 부리나케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내 흔적을 남기기 위한 '무언가'는 책갈피다. 굳이 내 돈 주고 사고 싶지 않을뿐더러 한두 개쯤 있으면 방구석에 쌓인 낡은 책에라도 어떻게든 끼어져 있을 법한 귀여운 소모품이라 생각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다독가들에 대한 내 애정 어린 사심 때문이기도 하다.
책갈피의 디자인은 오픈채팅방에 오가는 사진을 보며 영감을 얻었다. 가봤을 리 없는 그곳은 단지 사진 한 장과 내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그려졌다. 푸른 하늘, 붉은 양귀비 꽃밭, 그리고 길.
길 위에서 첫 신고식은 생장에 도착해서였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함께 안내받은 한국 여성분이셨다. 디자인 쪽에서 일하시는 민경 씨와는 생장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봤지만 서로 모른 척하다 이제야 인사를 했다. 안내받길 기다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번쩍 책갈피 생각이 났다. 드디어 개막식을 여는구나. 속으론 정말이지 설렜지만 앞에선 부끄러운 척 내가 만든 책갈피는 기념 선물이라고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당황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이거 만들기 참 잘했잖아? 힘 입어 안내자 분께도 전했다. 왜 주는 사람이 더 기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크레덴셜을 발급받으려면 비용이 든다. 23년 7월 기준 2유로. 냅다 내 순례자 여권 비용을 내는 민경 씨는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 말했다. 이러려고 만든 게 아닌데. 괜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물과 동시에 부담을 함께 준건지, 별생각 없이 만든 선물이 좀처럼 어렵게 다가오고 있다.
이후 만나는 순례자들에게 뻔뻔히 선물을 주고 다녔다. 만든 게 아까워서도 있고 이 짧은 여행길에서는 굳이 부담을 가지려고 다짐을 하지 않는 이상 기쁜 마음만 남길 거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리 되는 것 같았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은 이들에겐 물론이요, 죽음의 피레네 산맥이나 그만큼 혹독한 길들 위에서 조차 만난 까미노 친구들에게 잊지 않고 건넸다. 간혹 물물교환 하듯 내 선물에 보답한다며 자신의 간식을 내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기쁜 마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줬는데, 그 표정과 말 만으로 즐거웠다. 적어도 내 산티아고 길의 프렌드십 만큼은 그 누구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귀하고 값진 경험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