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아까워 옷장에 두고 보기만... "사랑 한 번 못 해봤는데"라며 눈
영하 17도다. 며칠새 급 추워진 날씨에 보일러가 얼어터졌다. 집은 냉동고로 변한 듯 하얀 입김만이 부연하게 번져나간다. 휴일이라 모두 문을 닫은 시간이다. 염치 불고하고 우리 마을 맥가이버에게 긴급 SOS를 하고 집에서 가지고 온 짐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을 때다.
정이 할매가 급하게 전기 주전자를 들고 오셨다.
"집에 갔다 왔나? 빨리 왔네... 이 고쳐봐라."
"어! 제가 (꽃)할매 드린 전기주전자네요?"
"그래, 할매가 아끼다 처음으로 군에서 할매 돌봐주는 사람이 왔길래 꺼내서 자랑한다고 물을 끓였단다. 근데 뚜껑을 열 줄 몰라서 아주마이한테 열어달라고 했는데... 귀가 안 들리는 우리 할매 귀에도 '똑! '하고 소리가 나더니 이래 뚜껑이 부러졌단다. 에고, 할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는데 아무래도 그냥 두면 안 되겠어서 내가 고쳐준다고 가지고 왔지. 여튼 힘 닿는 대로 한번 고쳐봐라. 우리 할매 운다."
아찔한 냉기에 머리통도 시리고 손도 발도 꽁꽁 얼어버린 아수라장에 우리 꽃할매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다니 순간 정신이 멍하다.
맥가이버가 고쳐준 전기포트를 정이할매집에 가져다드린다. 꽃할매는 귀가 어두우셔서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도 듣지를 못하신다. 그러한 꽃할매임이도 능숙하게 의사소통하는 분이 있으시니 곧 정이할매시다.
지난 10월 즈음이다. "점심 먹었니껴" 연거푸 반복해서 물으신다. "먹었어요"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우리 꽃할매는 "나랑 점심 먹읍시더. 우리 집에 옵니껴"라고 하신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우리 꽃할매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6.25전란과 근대화를 지나 근 한 세기를 사셨다. 나랑 점심을 하고 싶어 하시는 꽃할매의 말귀를 얼른 알아듣고 '곧 갈게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드렸다. 꽃할매는 안심이 되셨는지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완전 비건인 꽃할매를 위해 연한 열무를 씻어 함께 먹을 쌈을 가져갔다.
꽃할매는 다리 달린 동그란 알루미늄 밥상에 빨간 찬합을 열어놓고 갓 지은 따뜻한 쌀밥을 상에 올리셨다. 오늘 봉화군에서 도시락 반찬이 왔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게 나한테 밥 먹었냐고 물어보셨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군에서 배달온 도시락 반찬을 같이 나눠 드시고 싶었던 것이다.
2~3일에 한 번씩 오는 반찬이니 두고 드셔도 되지만 우리 꽃할매는 항상 도시락 반찬이 오면 이웃들과 나눠 드셨다. 근사한 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95세 꽃할매가 사랑과 정성으로 차려주신 귀하디귀한 밥상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꽃할매는 커피 마시자며 할매의 안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 커피포트에 물을 팔팔 끓여 노란 봉지 커피를 타주시는데 꽃할매가 타주시는 커피라 참 감칠맛 났다. 꽃할매는 고장난 전기 주전자를 얻었는데 참말로 신통방통하다며 너무 기뻐 자랑하셨다.
전기 주전자가 있기 전에는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워 드셨으니 거기에 비하면 훨씬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의 전기 주전자는 물이 끓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차단되는데 꽃할매의 주전자는 그런 기능이 고장 나서 플러그를 뽑아야 한다. 연세가 많으신데 물을 올려놓고 잊어버리면 큰일이다. 또 전기 주전자가 펄펄 끓을 때 플러그를 뽑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체구가 작으신 꽃할매, 그러나 봉지 커피는 꼭꼭 챙겨 드시는 우리 할매에게 시급히 전기 주전자를 마련해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같이 도시락을 까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이다. 손에 힘이 없는 할매를 위해 가장 작은 전기 주전자 하나를 선물로 드렸다.
"할머니, 지금 쓰시는 거 버리세요. 물 끓이다 플러그 뽑는 거 잊으시면 물 계속 끓어서 위험해요. 아셨죠?"
"고맙니더. 나 쓰라고 주는겁니껴? 왜 나한테 이런 거를.... 고마워서 어쩌나?"
꽃할매는 환히 웃으셨다. 기뻤다. 정이할매가 전기 주전자를 들고 오기 전까진 난 꽃할매에게 드린 이 주전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알겠어요. 어머니, 최대한 고쳐볼게요. 에휴 우리 할머니 또 사드리면 되는데 왜 우시고.... 제가 이따 갈게요!"
얼어 터진 보일러를 우리 마을 맥가이버가 고치는 사이 주섬주섬 짐을 정리한다. 얼어버린 분배기를 녹이기 위해 물을 끓이며 잠시 기다리는 동안 기계치인 나는 맥가이버에게 꽃할매의 작은 전기 주전자를 내민다. "이거 좀 해봐요." 몇 분 만지작거리더니 역시 맥가이버다. 금세 떨어져 나간 뚜껑이 고쳐졌다.
보일러가 녹아가는 사이 기쁜 마음으로 전기 주전자를 들고 정이할매집으로 갔다.
따끈따끈한 정이할매네 집은 참말로 봄이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 틈을 비집고 앉아 마늘 몇 톨을 같이 깐다. 정이할매가 말씀하신다.
"(꽃)할매가 너무 이뻐서 옷장에 싸놓고 보고만 있었단다. 근데 내가 가서 '언니! 사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써야 좋지. 보관만 하면 뭐하노. 언니가 이것을 쓰고 있어야 마음이 좋지' 내 그랬지. 그러니 할매가 생각해보니 맞거든? 고래 내가 며칠 후 가보니까 (꽃)할매가 전기 주전자를 빼놓은 거야. 잘됐다 했지. 그날 군에서 할매 돌보는 아주마이가 와서 우리 할매가 자랑을 했더래. 동네 새색시가 할매 전기포트 사줬다고.. 고래 물을 넣고 끓였는데 뚜껑을 열줄 몰라서 군에서 온 아주마이한테 열어달라고 했는데, 글쎄 힘을 너무 줬나? 귀가 어두운 당신 귀에도 '똑!' 하고 소리가 나더니 뚜껑이 분지러져 버렸데."
"아휴, 어머니 다시 사드리면 되죠. 근데 왜 할매는 왜 우시는 건데요?"
"글쎄, 들어봐라. 나 쓰라고 사줬는데..."
나는 이거 사랑 한 번도 못 해봤다....
"그러면서 울먹이는데 내가 마음이 짠하더라. 우야나.... 그래, 이 주전자를 고쳐야 안 하겠나? 우리 할매 마음이 아파 저래 있는데 어짜노. 고쳐봐라...."
처음 들어본 표현이지만 참 곱고 아름다운 말이다. 꽃할매가 고이고이 아껴둔 전기주전자. 그것을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망가져 버린 것에 우리 할매는 눈물이 그렁그렁 '사랑도 한 번 못 해봤는데' 하신다. 우리 꽃할매 마음이 참 고우시다.
그때 꽃할매 집의 고장난 주전자를 없애버렸으면, 새 것을 쓰셨을 테니 '사랑도 못 해봤다'고 할매가 울지도 않았을 텐데 잠시 후회가 됐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사드린 밍크 수면 바지가 생각이 났다.
"어머니, 지난번에 제가 수면 내복 바지도 사드렸는데, 그것도 옷장에 있는 거 아녜요? 또 일이라도 생기면 사랑도 못 해봤다고 할 텐데."
"그래? 그럼 내가 내일 당장 가서 조사해야지! 하하하"
"어머니, 할머니 예전에 입던 수면 바지 얼른 버려버리셔요. 그래야 새 옷 입지 안그럼 또 사랑도 못 하고 있을 거 아녜요. 꽃분홍에 그림 그려져 있고 발목에 고무줄 달려있어요."
"그래, 내가 내일 날 밝으면 얼른 가볼게."
달이 더없이 맑고 푸르스름한 겨울밤이다. 우리 집 보일러가 서서히 녹아가는 동안 우리의 겨울밤도 마음도 그렇게 따뜻하게 데워져 간다.
덧붙이는 글 | 꽃할매의 말씀이 참 곱고 아름답습니다. 물건을 준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해 사랑해주시는 그 마음이 참 감동입니다. '사랑 한 번도 못해봤는데...'라는 말하지 않게 우리 주변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되면 참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