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아
흰쌀 위로 물이 쏟아진다. 손을 담가 차르륵 차르륵 휘저으니 맑았던 물에 뿌연 쌀뜨물이 퍼져나간다. 쌀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튼다. 손을 담가 차르륵 차르륵 쌀을 휘젓고 뿌얘진 물을 다시 조심스레 흘려보낸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낱알들이 물과 함께 흘러가버린다.
/ 백미 취사 시작합니다.
글쓰기를 배우고 블로그에 글을 쓴 지 6년이 되었다. 그 6년 중 3년은 브런치에 글을 써왔고 그 3년 중 2년은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무수한 구독자 0명의 날들과, 무수한 투고와, 무수한 거절과, 무수한 무응답의 시간들을 거치며 좌절을 겪었다. 구독자가 한 명, 또 한 명 늘어날 때마다 두 손을 모아, 들리지 않을 감사의 인사를 보냈지만, 목이 말랐다.
좌절도 사치 같았기에 사치를 저만치 밀어 두고 투고를 했다. 종종 편집자님들이 답장을 보내왔다. 긍정적인 답장이 아니더라도 무응답보다는 나았다.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무엇이 없다는 공통된 응답이 내 글이 더 나아지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인 듯했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일까? 일만 시간? 내 글이 더 많은 이의 가슴에 닿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몇 년일까? 10년? 아니면 20년?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내게 글을 쓰는 일은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갈등들을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그래도 놓을 수 없는 끈질긴 과정이었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기에 구체적이고 실재적일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조심스레 쌀을 휘저으며, 무엇이 떠오르는지 봐야 하는 작업이었고, 남은 쌀뜨물을 종이 위에 길어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낱알 하나조차도 내 마음의 어떤 부분들을 이루고 있었던 소중한 요소들이었다. 그것들도 버리지 않고 그러모아 기록으로 남겼다.
내 글에 구체성과 실재성이 부족했던 이유는, 그런 마음의 요소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숙하고 싶지 않아서, 서툴고 싶지 않아서, 아직도 상처에 메여 있고 싶지 않아서, 멋있고 싶어서 써 내려갔던 글들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없는 글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독자들이 원하는 사람은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툴지만 무해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사람,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더 정이 가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평가받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추구하기만 하면서 내 마음속에 숨어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직도 서툴고, 미숙하다. 누군가가 하는 충조평판에 내상을 입는다. 아직도 여전히 조건 없는 사랑을 그리워하고, 가슴에는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다.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외롭고, 추락하는 빗물처럼 슬프다. 나는 변하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예전의 나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감정들에 압도되어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그것으로부터 조금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들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느낀다.
지난 3년간 배운 것은 기다림이다. 나를 압도하는 감정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길을 가다 갑작스레 만난 소나기처럼 나를 어느 처마 밑으로 피신시킨다. 처마 밑에서 운동화 앞코로 고인 물에 장난을 치며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다시 찾아올지언정 지나가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따듯한 밥 같은 글을 짓고 싶다. 배고픈 누군가를 살찌울 수 있는 글, 지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 엄마가 차려주는 밥 한 그릇이 그리운 이들을 위해 차려내는 밥같은 글을 짓고 싶다. 글을 짓는다는 말과 밥을 짓는다는 말이 같은 이유는 아마도 그 본질이 같아서가 아닐까. 허기를 채우는 것, 글짓기와 밥짓기는 그래서 같은 말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