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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안 되는 눈물 따위

엄마의 대환장 1

by 흔들리는 민들레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큰아이는 비록 조산을 할 뻔하기는 했지만 자궁수축 억제제를 열흘 동안 양팔의 핏줄이 다 터질 때까지 달고 있었으므로(그래도 다행히? 발목에 바늘을 꽂진 않았다. 꽂을 뻔했지만.) 예정일보다 2주 정도만 빠르게 태어났다.


큰아이를 임신하고는 입덧이 심해서 6개월까지 입에 얼음만 물고 있었고, 7개월쯤 조산의 신호가 있어 입원하는 바람에 절대 안정을 하느라 소화가 잘 안 되고 또 병원에서 화장실도 못 가게 해서 음식을 못 먹었더니 만삭 때 몸무게가 6킬로 정도밖에 늘지 않았다. 그나마도 출산을 하고 나니 3킬로는 빠졌고 모유수유를 밤낮없이 하니 남은 3킬로에 3킬로가 더 빠져 본의 아니게 결혼 전의 몸무게로 돌아가버렸다. 그때가 스물여덟이었는데 동네 어르신이 나를 보시고 애가 애를 낳았다고 하셨다. 아마 비쩍 말라서 더 그렇게 보였을 것 같다.





귀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는 참 어렸다. 모든 게 서툴렀고 모든 게 다 신기하기만 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갓난아이와 둘만 남겨지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혼자서 이 작은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 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건지 또, 왜 그렇게 수유를 하려고만 하면 잠만 자는지, 잠들어서 내려놓으면 또 왜 그렇게 금방 깨는지, 또 왜 그렇게 밥만 먹으려고 하면 우는 건지, 또 왜 그렇게 기저귀를 갈자마자 똥을 바로 싸버리는 건지, 또 왜 그렇게 낮에는 잘 자다가 밤만 되면 울어 재끼는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일들 투성이었다.






그 와중에 열이 나고 가슴이 스치기만 해도 아파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티셔츠를 앞으로 잡아당기며 집안일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손수건과 배냇저고리를 세탁해 널어야 했고, 어느새 수북이 쌓인 기저귀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놔야 했다. 밥은 차릴 시간이 없으니 아이를 안고 빵을 뜯어먹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앉아서 졸고 걸레질을 하다가도 졸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울면 나도 같이 울었다. 아이는 배가 고파 울고 나는 너무 자고 싶어서 울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가슴이 너무너무 아파서 또 울었다. 임신과 출산 책을 뒤져보니 젖몸살이 왔을 때 양배추를 가슴에 붙이는 방법이 있어 마침 냉장고에 든 시들어빠진 양배추를 꺼내 대충 삶아 식혀 양쪽 가슴에 붙이며 현타가 와서 또 울었다.










어깨, 손목, 등, 가슴, 허리, 다리, 골반, 안 아픈 곳이 없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으며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생각도 안 나고, 세수는 언제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온몸이 너무 아프고 너무 졸리고 너무너무 피곤한데 아이는 한, 두 시간마다 울었다. 배고프다고 울고 오줌 싸서 울고, 똥 싸서 울고, 묽은 변이 아이의 등까지 올라와서 옷을 벗겨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는데 트림하다 토하거나 기저귀에서 소변이 새어 오분만에 또 갈아입혀야 하는 일들이 무수했다.


어느 날엔 아이를 베란다 창밖으로 던져버릴까라는 강렬한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어디선가 넌 쓰레기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고파 우는 아기를 안고 아픈 가슴을 열어 아이의 입에 모유를 채워 넣으며 울었다. 엄마가 너무 나빴다며 미안하다고 엉엉 울었다.

눈물은 참 끝도 없이 솟아났다. 기왕 솟아날 거 기름으로 솟아나면 돈이라도 될 텐데 나는 유전이 아니라 그냥 사람일 뿐이었다.








아이가 질을 통과하기 직전 그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살려달라고 했는데 그 말을 출산 이후에도 하게 될 줄을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또 외쳤던 것 같다.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어떤 편집도 불가능한 날것의 날들, 그것이 바로 엄마로서의 삶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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