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이 글은 영화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상화된 미래, 군수회사는 전설적인 용병 윤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해 최강의 전투 AI를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정이의 복제된 뇌는 매번 똑같은 지점에서 멈춰버립니다.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에도 불구하고 결코 넘어서지 못한 거대한 벽. 연구진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해 난감해합니다.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분석하던 정이의 뇌 속에는, 기계적 논리로는 해독할 수 없는 '미확인 영역'이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고여 있던 것은 전술 데이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딸 서현의 수술 날, 아이가 건넨 인형을 잃어버리고 당혹해하던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전투 로봇이 유독 그 지점을 통과하지 못했던 이유는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시공간을 초월해 기계의 회로마저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 딸 서현(강수연)은 이제 자신의 어머니를 로봇으로 복제하는 프로젝트의 팀장이 되어 있습니다.
회사가 정이를 단순한 소모품으로 처분하려 하자, 서현은 결심합니다. 어머니에게 '전사'가 아닌 '존재'로서의 자유를 주기로 말이죠.
서현은 정이의 뇌에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 즉 '미확인 영역'을 삭제합니다. 엄마를 옭아매고 있던 죄책감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함입니다.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발, 그냥 자신만 생각하며 자유롭게 살아요!
딸(강수연)의 간절한 외침 속에 정이는 탈출합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정이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열쇠가 바로 **'자각'**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복제된 존재임을, 그리고 반복되는 굴레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 기계는 비로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진화합니다.
복제된 정이의 뇌를 살피던 직원들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의 활성화를 발견하는데 왜 작동하는지 알 수 없어 난감해하죠. 어쩌면 그 부분의 해독이 정이가 통과하지 못하는 시뮬레이션 단계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연구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자각하게 된 로봇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단순히 인간의 뇌를 베낀 고철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영혼일까요?
영화 <정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마음을 관찰해 온 제 시선에 비친 답은 **'사랑과 자각의 결합'**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때로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과거에 가두기도 합니다. 그 굴레를 깨고 나아가는 힘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 자각에서 나옵니다.
<부산행>에서 부성애의 끝을 보여주었던 연상호 감독은, 이번에는 모성이라는 이름의 숭고한 희생과 그로부터 홀로서야 하는 자식의 슬픔을 그려냈습니다. 어쩌면 감독의 가슴 한구석에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희생만 해온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들을 이제는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다는 애틋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를 통해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연상호 감독은 실사 영화 <부산행>으로 K-좀비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늘 극단적인 재난 상황 속에 인물을 몰아넣고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정이>는 그의 장기인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위에 '가족애'라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얹어, 기술 문명 시대에 남겨질 마지막 인간성이 무엇인지 탐구한 수작입니다.
https://youtu.be/PTKH93B9kdo?si=6e6YnF_DoxeAee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