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사이먼즈
2024. 8. 12. 16:35
넷플릭스 시리즈 <죄인 1>은 8부작으로 하나의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멈출 수 없는 흡입력과 치밀한 극본,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까지 두루 갖춘 이 작품은 인간의 무의식을 하나의 살인 사건으로 풀어냅니다.
8부작은 시리즈물이 가지는 특성, 전개의 지지부진함과 그로 인한 몰입 저하라는 공식을 완전히 깨부수며 묵직한 마침표를 찍어버립니다. 궁서체로 시작하여 고딕체로 끝나버리는 이야기, 그 묵직함을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한가로운 어느 주말, 주인공 코라는 남편 그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호수에 수영을 하러 갑니다. 모래놀이를 하는 아들, 그 옆에서 아들을 돌보는 남편을 보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냅니다.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저마다 돗자리를 펴고 햇볕을 쬐며 주말의 여유를 즐깁니다. 멀리에는 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잔잔하고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코라는 남편에게 아들을 맡기고 수영을 하러 갑니다. 작은 소용돌이조차 없는 고요하고 깊은 호수에서 그녀는 잠수를 합니다. 물속에 들어가니 물 밖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죠. 그 고요함이 어쩐지 두려움을 줍니다. 이 처음 장면에 8부작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깊은 내면으로 우리는 함께 따라가게 됩니다. 산소가 없는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처럼 두렵고 위태롭습니다.
코라는 행복해 보이는 한 커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음악을 크게 틀었고 그녀는 음악을 견딜 수 없습니다. 코라는 아이에게 과일을 깎아주던 칼을 들고 달려가 한 남성을 마구 찌릅니다. 코라는 남편의 제압으로 일곱 번을 찌른 후에야 멈추게 됩니다. 평화로웠던 호숫가는 순식간에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죠.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름답고 한가로운 호숫가에서 일어난 살인.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대조적인 환경과 사건이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삶의 공식을 완전히 붕괴시킵니다. 바로 여기에 트라우마의 본질이 투영됩니다. 그동안 내가 믿어왔고 경험했던 세계의 완벽한 붕괴를 시청자들에게 경험시키죠. 이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코라는 수감되고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를 찾아온 담당 형사 해리. 그녀에게 국선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쩐지 코라는 거부합니다. 빨리 끝내달라고만 하죠. 죽은 남자가 전에 아는 사람이었냐고 물으니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코라. 왜 죽였냐는 질문에 음악을 크게 틀어서라고 답합니다.
목격자와 증거는 충분하지만 동기만 없는 사건 앞에서 어쩐지 해리는 이대로 수사를 마무리하기가 내키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동기를 궁금해하지 않지만 그는 그녀의 동기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묻지만 코라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 혼란스러워하죠. 코라는 왜 처음 보는 남자를 찔렀을까요?
코라에게는 낙인 같은 동생 피비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여동생이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동생에게 코라의 엄마는 집착합니다. 병원에서 죽을 위기를 넘긴 동생을 데려온 엄마는 어린 코라에게 말하죠.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엄마의 힘을 다 가져갔단다.
아이 세 명 몫은 되는 힘이었지.
나중에 피비가 왔을 때는 엄마가 버틸 힘이 없었어.
그래서 동생이 아픈 거야.
기도했지. 병원에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기도했더니
기도를 들어주셨단다.
엄마 말 잘 들어.
그분이 바라시는 게 뭐든 우리가 무조건 해야 해.
코라는 죄책감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동생의 상태가 나빠질 때마다 깊은 죄책감을 느끼죠. 그리고 아픈 피비는 집착적인 엄마에게 모든 것을 통제당하며 아프지 않은 언니를 질투합니다. 언니의 삶을 동경하고 질투하죠. 어느 밤에 피비는 코라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비극은 시작됩니다. 코라가 현재에서 한 남자를 죽인 동기는 과거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죽은 피비가 담요에 싸여 숲 어딘가에 묻혀있던 것처럼 그렇게 숨겨져 있었죠.
해리는 코라를 통해 자기의 죄책감을 봅니다. 결혼생활의 어려움, 마조히즘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현재, 그런 과정에서 받은 손톱 안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흉터로 남아있죠.
우리가 어릴 때 누군가 우리에게 한 짓은 우리 탓이 아니에요.
우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코라는 결국 모든 것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진짜 죄인들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그녀는 절망의 끝, 깊은 공포의 끝에서 자신을 구해내고야 맙니다.
극 속에 등장하는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문은 극본을 쓴 작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해리 역을 맡은 빌 풀만의 명석한 인물 분석과 코라 역을 맡은 제시카 비엘의 연기는 넋을 잃게 할 만큼의 흡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은 극본, 연기, 연출의 삼박자가 너무나 조화로운 작품입니다.
제작 및 극본 : 데릭 사이먼즈 (Derek Simonds)
'치밀한 극본'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제작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고, <죄인> 시리즈 전체의 쇼러너(Showrunner, 제작 총괄)로서 인간의 억눌린 심리와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연출(시즌 1 파일럿): 안토니오 캠포스 (Antonio Campos)
시즌 1의 강렬한 시작을 연출한 감독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연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특유의 어둡고 서늘한 분위기와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감각적인 연출로 <죄인>의 독보적인 톤을 완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