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합니다.)
영화는 시각장애인인 아버지가 홀로 아들을 키우며 평생 도장을 파온 장인이라는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어느 날 아들에게 경찰의 전화가 걸려오고, 그는 발견된 백골의 시신이 어릴 적 사라진 어머니 '정영희'임을 알게 됩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지,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은 아들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머니를 '추하고 못생긴 여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아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습니다. ‘대체 얼마나 못생겼기에 온 마을 사람이 저토록 잔인하게 기억하는가?’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관객 역시 마을 사람들의 폭력적인 프레임에 전염되고 맙니다. 여기서 ‘영희의 얼굴’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타인들의 혐오와 수치심이 쏟아진 ‘투사적 대상물’로 전락합니다. 타인들은 영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대신, 그녀라는 스크린 위에 자기 내면의 오물을 던져 ‘못생김’이라는 가짜 피부를 덧씌웠습니다. 얼굴은 영희의 것이었으나, 그 얼굴에 새겨진 정의는 철저히 타인들의 욕망이 배설된 전장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추적하던 아들은 마침내 평생 존경해 온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합니다. 아버지는 반성 대신 자기가 아름다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며, 아내가 자신을 속였기에 죽였다는 기괴한 자기 연민을 쏟아냅니다. 영화에서 아버지의 시각장애는 물리적 맹목을 넘어 심리적 맹목으로 확장됩니다. 그는 물리적으로 볼 수 없기에 타인의 시선을 빌려와 존재를 규정했고, 그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 아내의 행동을 견디지 못해 그녀를 제거하고 맙니다.
그의 행위는 실재하는 아내를 없애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내면의 수치심과 열등감, 두려움과 무력감을 제거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자신의 불완전성을 은폐하기 위해 아내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도장에 이름을 새기듯 아내라는 존재를 자기 방식대로 규정합니다. 그것은 심리적 맹목 상태에서 구축한 견고한 세계이자, 그만이 믿는 가짜 진실입니다. 나아가 아버지는 아들 역시 한 명의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지탱해 줄 하나의 도구로 각인하려 합니다.
영화는 아들이 진실을 폭로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대신, 아버지의 심리적 맹목을 그대로 이어받아 눈을 감기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와 닮았네요”라는 PD의 말처럼, 아들이 내린 은폐의 결정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자라난 자의 필연적인 선택입니다. 진실은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겁고 거대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내면의 힘이 필요하지만, 평생 아버지의 틀 안에서 ‘심리적 맹인’으로 길러진 아들에게는 그 진실을 마주할 마음의 근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영희라는 존재는 마을 사람들의 투사 속에서 죽었고, 남편의 도장 속에 박제되었으며, 이제 아들의 침묵이라는 무덤 속에 다시 묻히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토록 궁금해하던 영희의 평범한 사진이 공개되는 순간 모든 거짓 정의는 무너집니다. 미추(美醜)가 없는 백골과 지극히 평범한 얼굴은, 인간이 내린 모든 ‘거짓 규정’이 실존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웅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다’와 ‘응시한다’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전적 정의로 ‘응시’는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이지만, 나는 이 단어를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는 ‘형용사’로 새롭게 정의하고자 합니다. ‘본다’는 것이 수평적이고 평면적인 물리적 행위(동사)에 불과하다면, ‘응시한다’는 것은 물리적 행위를 넘어 대상의 본질을 보려는 형용사적 의지를 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용사는 대상을 꾸미는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대상의 본질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려는 태도입니다. 단순히 눈에 맺히는 상을 넘어, 내가 마주한 존재의 실존이 가진 형용사적 진실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러한 응시는 무책임한 방관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방관이 외면이라면, 응시는 대상의 진실이 내 안으로 밀려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치열한 직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내를 보았으나 응시하지 못했고, 아들 역시 아버지의 수치심은 보았으나 어머니의 진실을 응시할 근력은 없었습니다. 나는 아들이 차마 하지 못했던 그 ‘응시’를 감행하며, 타인이 정의한 모든 가면을 벗기고 그 아래 놓인 뼈와 같은 진실을 향해 작별의 인사를 건넵니다.
"당신은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고, 슬프거나 비참하지 않고, 나쁘거나 좋지 않으며, 누구이거나 누구이지 않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다. 당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당신의 존재를 애도한다. 나는 당신이라는 진실의 영원한 목격자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얼굴>들에 나의 진심이 닿기를..."
연상호 감독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독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뉩니다.
1. 잔혹한 현실의 기록자 (애니메이션 시기)
실사 영화로 넘어오기 전, 그는 <돼지의 왕>, <사이비> 같은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 학교 폭력, 종교적 광기를 아주 서늘하게 그려냈습니다.
특징: 미화 없는 현실, 지독할 정도의 비관주의, 인간 내면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끝까지 추적하는 집요함이 돋보입니다.
2. K-장르물의 개척자 (실사 영화 시기)
천만 관객을 동원한 <부산행>을 시작으로 <염력>, <반도>, 그리고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기생수: 더 그레이> 등을 통해 한국형 좀비물과 디스토피아 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특징: 초자연적인 현상(좀비, 지옥의 사자 등)을 던져놓고, 그 재난 앞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하는지 혹은 어떻게 연대하는지를 실험실 쥐를 관찰하듯 보여줍니다.
그는 "진실이 무엇인가"보다 "사람들이 진실을 어떻게 조작하고 소비하는가"에 더 집중하는 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