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다치지 않기 위한 거리 – 경계

가족이라는 끈적한 폭력

by 흔들리는 민들레


인생의 긴 투쟁을 지나 내가 도착한 곳은 일상이었다. 그곳은 작고 평온한 고요의 오두막이었다. 나는 이제 친정엄마와 남편과 다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선을 긋는다. 하지만 경계선을 긋는다고 해서 침범이 즉각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관성을 가지고 자기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내가 선을 그으면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선을 넘었고 내가 물러서면 더 깊숙이 발을 들이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멈추세요, 거기까지입니다."라고 차갑고 명확하게 경고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내 영토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다행히 남편은 그 거리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장모와 나 사이의 갈등에서 나를 문제적 존재로 몰아세웠던 그의 불편함이 실은 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의 해결되지 않은 무력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남편이 자기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분리해 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이에는 비로소 타인을 탓하지 않으려고 하는 맑은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정엄마는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여전히 침범을 반복하고 있고, 나를 원망하며 미워하고, 저주하며 내가 세운 경계를 증오한다. 경계는 나와 상대방이 다치지 않고 서로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사랑할 수 있는 선이다. 선을 지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그리고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거리다.


그러나 단순히 경계만 세운다고 관계가 나아지지 않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고요였다. 흔들리지 않으며 버티고 서서 이곳이 경계임을 경고하고, 이 경계가 여기에 있어도 너와 나는 분리되지 않으며 함께일 수 있다는 안정감을 경험하게 해주어야 했다. "나는 그래도 여기에서 너를 기다린다."를 고요하고 단단하게 반복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경계 없이 마구 침범했던 상대방이 경계를 배운다. 나는 남편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친정엄마에게도 그런 대상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다 내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선택이다.


전에도 말했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이 더 쉽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응시하면서(직면) 그들로 나를 배우는 일이 더 어렵다. 그러나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경고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내 삶에 너무 큰 위협이 되어서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관계는 즉시 끊어내야만 한다.


친정엄마의 미분화는 내 자아를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게 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수용하고 표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랄 수 없었으며 의존적이며 눈치 보게 했다. 자기중심보다 타인 중심으로 살게 했다. 그 모든 일들을 지금 다시 재경 험하면서 그녀의 어떤 말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어떤 방식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배우며 다시 건강하게 표현해보고 있다. 나는 건강하게 표현하지만 그녀가 건강하지 않게 표현해도 괜찮다.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어쩌면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그녀의 어떤 면이 현재에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안에 형성되고 발달되지 못한 어떤 면의 원인과 결과, 선후관계를 배우고 그 선후관계에서 파생되는 어떤 것들도 배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을 비교하면서 그때와 지금이 무엇이 다른지, 그때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검토하고 있다. 정리되지 않았던 것들을 그러모아 다시 정리하면서 통찰하게 되는 것들도 있다.


결국 경계를 세우는 일은 상대의 침범을 완벽히 차단하는 마법이 아니라, 상대의 관성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이다. 자립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독립된 인격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도구로 본다. 엄마가 여전히 경계를 증오하며 침범을 반복하는 것은 그녀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시스템의 관성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관성을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대신 그 관성을 응시하며, 내 안에 잘못 입력된 ‘타인 중심의 회로’를 하나씩 끊어내고 나만의 문법으로 다시 프로그래밍할 뿐이다.


이것은 관계 안에서의 ‘실존적 실험’이다.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고통스러운 대면을 지속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립은 관계를 끊어내는 물리적 단절보다, 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정서적 비유착’에서 완성된다. 나는 변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역설적으로 나의 변화를 확신한다. 그녀의 비난이 더 이상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지 못할 때, 나는 비로소 시스템이 설계한 ‘죄책감의 감옥’에서 완전히 출옥했음을 실감한다. 이 평원은 서글프지만, 내가 직접 경계를 긋고 지켜낸 나의 유일한 영토다.





관찰 자아(Observing Ego)의 확립

상대의 공격이나 질투 앞에서도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관찰 자아'가 뿌리내렸음을 의미한다.

담아내기(Containing)와 안전 기지(Secure Base) - 윌프레드 비 온 & 존 볼비

"나는 여기서 너를 기다린다"를 고요하게 반복하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일종의 안전 기지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의 미성숙함을 내가 소화하여 '경계 내에서의 안전함'을 가르치는 고도의 정서적 리더십이다.

교정적 정서 경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 - 프란츠 알렉산더

과거의 엄마가 주었던 상처(원인)와 그로 인해 형성된 나의 방어 기제(결과)를 현재의 시점에서 대조하는 과정이다. 변하지 않는 엄마를 '살아있는 교과서' 삼아 과거의 미결 과제들을 하나씩 종결짓는 이 과정은 외상 후 성장의 가장 강력한 형태이다.


자아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 - 머레이 보웬

남편이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부부라는 유기체 내에서 자아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타인을 탓하지 않는 '맑은 공기'는 각자가 자기감정의 주인이 될 때만 비로소 허락되는 성숙의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