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고3 담임 선생님이 제 품을 떠나는 우리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너희가 신용카드와 면허증을 아주 천천히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쓰고, 자동차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 좋겠다고. 운전을 시작하면 앞을 보며 달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차창 밖에 보이는 풍경에 눈을 맞추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며, 앞보다는 옆을 보는 어른이 되어달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기에 선생님의 바람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20대 내내 체크카드를 썼고 1시간이 훌쩍 넘는 등하굣길과 출퇴근길에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졸업한지 10년이 지나고 29살이 되어서야 첫 신용카드를 만들고 면허증을 땄다.
별안간 내 차가 생겼다. 계약은 얼떨결에 했다. 1월 어느 주말, 엄마, 이모와 함께 현대차 매장에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차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지라 모든 게 속전속결로 정해졌다. 3월엔 옵션을 한번 바꿨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다 뺐다. 출고 예정 시점이 5월에서 7월로 미뤄졌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면허증 잉크 마르는 동안 운전대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터였다. 운전 연수 받으면서 기다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5월 초에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 주면 차가 출고된단다. 원래 7월이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운이 좋아 일찍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부랴부랴 자동차 보험을 알아보고 새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새 카드에 차 대금 결제 내역이 떴다. 쉼표가 두 개 찍힌 천만원 단위의 결제 금액이라니. 생경한 숫자였다. 설레는 동시에 두려웠다. 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될까. 우리나라 민법상 성년의 기준은 만 19세 이상이다. 성년이 되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 있다. 그럼 성년은 어른일까. 난생 처음 술을 마셨을 때 잠깐이나마 어떤 짜릿한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그 자체가 어른이 된 느낌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미성년자이기에 할 수 없었던 것들, 일종의 금기가 깨지면서 오는 카타르시스였다. 나는 이번에 결제 금액을 보고나서야 내가 좀 어른처럼 느껴졌다. 차 결제 대금과 할부 값이라든가, 보험료라든가, 세금 같이 크고 작은 돈이 나가는 감각이 내가 나를 어른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확 늘어난 고정 지출 금액만큼 삶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어른이 누릴 수 있는 핵심 가치는 자유인 줄 알았건만 그 자유는 유료였다.
사실 살아 숨 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게 다 돈이다. 6개월에 한 번씩 소프트 렌즈를 살 때면 하다하다 보는 일에도 돈이 드는구나 싶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늘어날수록 세상에 지불해야 할 값도 는다. 그건 의식주를 넘어 자유, 편리함, 어쩌면 행복에 대한 대가인 것도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부한 말을 피부로 느낄 때 인간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지불해야할 값이 는다는 건 곧 책임져야할 게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건강, 내 차, 내 집 같은, 내가 값을 내고 지키는 나의 것들에 관심이 집중된다.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내고 싶은 만큼 마음이 옹졸해진다. 국어사전에 어른을 검색하면 첫 번째 정의가 이렇게 나온다.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결국 어른이란 책임을 지는 사람. 책임의 무게가 어른의 시야를 좁힌다.
체크카드를 쓰고 대중교통을 타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일찍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상을 꾸리는 데 있어서 최저시급이 가늠자가 되었다. ‘이 동아리 활동은 아르바이트를 빼고 올만한 가치가 있나?’ 다시 말해, 24,300원(당시 최저임금은 시간당 4,860원이었다.)의 값어치를 하는지 따졌다. 자연스럽게 시간을 쓰는 일에 인색해졌다. 허투루 쓰는 시간은 용납이 안됐기에 대중교통을 탈적에도 최단 거리에 빠른 환승 구간을 미리 검색해서 다녔다. 애초에 가진 게 없으니 마땅히 지킬 것도 없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얼마 되지도 않는 나의 것, 그러니까 고작 시간과 체력을 지키겠다고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살아온 게 맞나. 앞이 아닌 옆에 곁눈질이라도 한 적이 있나. 어쩐지 속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달려온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는 어른이란 뭘까. 그 핵심에 호기심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웬만한 어른이면 자기 앞가림은 썩 잘 한다. 거기에 그치면 그냥 밥값 하는 어른인 거다. 옆을 보는 어른은 나 아닌 사람까지도 이따금씩 챙길 줄 아는 사람이다. 타인과 타인의 삶을, 내가 모르고 있던 세상을 기꺼이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선 여유는 물론,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타고 시위하는 저 사람들은 왜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됐을까. 이 더운 날 뙤약볕 아래서 목소리를 높이는 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저 배경으로 지나쳤던 풍경 속에서 사람과 삶을 보고자 노력해야 한다. 책임감에 짓눌려 가려졌던 시야를 의식적으로 넓히는 사람. 옆을 보는 어른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확장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요즘 새 차로 운전연수를 받고 있다. 운전석에 앉은 나는 정말 앞만 보고 간다. 앞만 봐도 신호등 보랴 표지판 보랴 차선 보랴 눈과 머리가 바쁘다. 차창은커녕 오른쪽 사이드미러에 눈을 맞추는 것조차 힘들다. 운전이 익숙해지면 아마 지금보다는 넓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운전 중에 한가롭게 창문 밖 풍경을 감상할 생각은 없다.(안전 운전!) 다만 궁극적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넓은 시야로 살고 싶다. 맹목적으로 도착지만 향하는 사람은 되지 않길. 설령 길을 잘못 들어도 너무 노여워하지 않길. 내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을 기꺼이 궁금해 하는 사람이길. 훌쩍 다 자란 지금도, 여전히 나는 옆을 보는 어른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