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진 2302호 투고글
<intro>
학창시절 팬이라는 정체성으로 좋아했던 내 가수들. 그때 온몸, 온마음으로 익힌 ‘좋아함’의 힘으로 이렇게 길 줄 몰랐던 일생을 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1장> 서태지 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데뷔해 1년에 한 번 꼴로 앨범을 내며 온 나라와 청소년 자녀를 둔 가정을 흔들어 댔다. 나는 12살 때 문제의 3집을 들은 뒤로 덕질을 시작했다. 지금은 팬덤, 덕후라는 양지의 개념어가 존재하지만 그때는 다들 음지의 빠순이, 빠돌이였다.
3집 접수 후 나는 과거로 시간을 돌려 1집부터 그때까지 발매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모든 앨범을 사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수록곡들을 머릿속에 주입했다. 2집 콘서트 라이브 앨범의 〈우리들만의 추억〉과 〈마지막 축제〉가 하염없이 반복해 흐르던 내 방. 노래 제목처럼 그 시절은 서태지 당신과 나, 우리들만의 추억이 되었다.
당시 국민학생이던 난 서태지와 아이들이 속해있던 기획사 위프로덕션의 연희동 매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사진과 포스터, 책받침 따위를 사들였다. 아빠는 사업이 망한 뒤 대리운전을 하고 엄마는 전업주부에서 동네 마트 판매원으로 생활전선에 나서던 시기, 바퀴벌레 들끓는 어두컴컴한 삼각맨션의 딸에게 그것들을 살 돈이 어디서 났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떻게든 마련되기 마련이니 덕질이란 참으로 신묘하다.
3집의 타이틀곡은 〈발해를 꿈꾸며〉였지만 진정한 대표곡은 단연 〈교실 이데아〉였다.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의 서태지가 태생의 로큰롤 재질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 이 앨범은 대중이 록에 입문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고 내게도 그랬다. 난 서태지를 통해 록밴드 크래시, 시나위, 신중현을 거슬러 올라가며 국내 록신을 팠고, 서태지가 엑스재팬의 베이시스트 타이지에게서 이름을 따왔다고 해서 엑스재팬으로 넘어가 화려한 일본의 록신을 팠다. 레퍼런스가 많은 서태지의 음악은 무수한 출구를 가진 인터체인지였다. 미국과 유럽의 록신은 신대륙처럼 드넓었다. 학창시절은 물론 20대까지 나는 너바나로, 메탈리카로, 링킹파크로, 라디오헤드와 뮤즈로, 그리고 다시 레드 제플린으로, 딥 퍼플로, 퀸으로, 다이어 스트레이츠로 종횡무진 취향을 넓혀나갔다. 학교 앞 레코드 가게의 털보 아저씨, 〈핫뮤직〉과 〈서브〉 등의 음악잡지와 부록으로 주던 샘플러 CD는 내 강력한 서포터였다. 현재 내 음악 취향의 기본값이 록으로 매김된 것은 그 시절 서태지를 타고 록의 토양으로 넘어온 결과다.
〈교실 이데아〉는 일명 ‘피가 모자라’ 사태를 겪으며 백마스킹이란 개념을 전파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갓 해프닝이지만 당시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룰 정도로 우리 사회는 무식하게 진지했고, 거기 혹한 나도 3집 테이프를 하나 복제해 뒤집어 끼워서 들어보기도 했다. 제대로 ‘피가 모자라’가 들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했을 때 방구석에서 홀로 서태지는 알지도 못하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애먼 부모와 친지들의 속만 태우던 나. 하지만 역시나 시간은 약이었다. 은퇴 이후 발매된 〈시대유감〉은 어느 야외에서 개최된 ‘서태지와아이들기념사업회(이하 서기회)’ 총회 때 커버 공연으로 감상했다. 서기회는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후 갈 곳 없는 팬들의 임시적인 마음의 둥지가 되어 주며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 에세이집이랄지 《벽이 아닌 문으로》 같은 소식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화 사서함을 통해 팬과 스타가 소통했는데, 서기회의 사서함 목소리를 담당하던 채송아 언니는 허공에 방황하는 팬들의 마음을 끌어안아 주었다. 게다가 서태지는 몇 년 후 솔로로 컴백했으니 그때 단식으로 굶어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제2장> H.O.T 기
그러나 태지보이스가 마련한 팬덤 장의 가장 큰 수혜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서태지 다음 획을 그은 H.O.T. 중학생이 되어 내 피 끓는 록스피릿은 H.O.T의 데뷔곡 〈전사의 후예〉에 명중해 버렸다. 난 〈교실 이데아〉의 ‘됐어! 됐어!’에 꽂히던 바로 그 느낌으로 ‘아~~~ 니가 니가 니가 뭔데!’에 꽂혔다. 너무나도 납득이 가는 흐름 아닌가. 이유 없이 모든 게 그냥 화가 나 몸이 터져 버릴 것 같던 질풍노도기를 나는 문희준 오빠와 함께 활짝 열어 젖혔다. 문희준의 별명이 ‘기즈모’라서 기즈모 인형을 사고 나우누리 ID를 ‘기즈모걸’이라 지었다. 지금은 엔시티 드림이 리메이크해 부르는 H.O.T의 〈캔디〉 노란 털장갑을 현실계에서 끼고 다니며 H.O.T의 앨범과 사진과 포스터와 잡지 등등 온갖 것들을 사 모았다. 역시나 그것들을 살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미스터리다.
팬의 수만큼 안티도 많았던 H.O.T를 덕질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붕어 아이콘으로 상징되는 립싱크 논란이었다. 10대 아이돌 댄스그룹이 물밀듯이 등장하던 시기, 서태지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세대갈등이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던 신구의 인정투쟁 시기, 들끓던 음악성 논란이 립싱크라는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였다. 가요톱10 같은 음악방송에서는 화면 상단 모서리에 붕어 아이콘을 띄워 ‘이 가수는 립싱크 중입니다.’를 표시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잔인한 처사인가. 그래서 나중에 CD 돌아가는 모양으로 수정되기는 했다.
어쨌거나 나도 오매불망 H.O.T의 라이브를 기다렸다. 그러나 가요톱10에서도, TV가요20에서도, 빅쇼에서도 H.O.T는 대쪽같이 립싱크만 했다. 실망이 차곡차곡 누적되던 어느 날 가요톱10에 나온 〈캔디〉 무대를 보는데 전주 내내 CD 아이콘이 뜨지 않았다. 월드컵 한일전을 중계할 때도 H.O.T 방송을 봐야 한다며 온가족에게 매국노 소릴 들으며 혈혈단신으로 맞서 왔던 나. ‘오늘이구나! 봐라! 내 오빠들도 라이브 한다! 내 오빠들도 가수다!’ 그러나 1절이 시작되자마자 부리나케 뜨는 CD 아이콘.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좌절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난 그날로 H.O.T를 탈덕하고 내 근본인 록으로 돌아왔다.
<제3장> 시나위 & N.EX.T & 자우림 기
그 뒤로 한동안 시나위나 넥스트를 파며 지냈다. 시나위는 서태지 때문에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본격 덕질한 건 〈사이키델로스〉 앨범을 듣고 나서였다. 난 이 앨범 때문에 김바다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넥스트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해철 때문이었다. 무한궤도부터 라젠카, 〈고스트스테이션〉, 〈100분토론〉까지 듣고 볼 게 참 많았다. 이 시기에 나우누리 시나위 팬클럽에서 ‘기즈모걸’ ID를 그대로 쓰다 과거의 H.O.T 덕체성이 드러날 위기를 겪고 ‘rockgirl’로 바꿨다. 한결 당당해진 난 열심히 활동해서 부시삽 자리도 맡았다. (당시 PC통신 동호회장을 ‘SYStem OPerator’ 앞 자를 따 시삽[SYSOP]이라 불렀다. 회장이 시삽이니 부회장은 부시삽이었다.) 당시 시나위 멤버들도 통신에서 팬들과 소통하곤 했는데 이때 신대철, 김바다와 채팅방에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자우림은 국내 1세대 밴드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이었고, 1집부터 전 앨범을 구비해 닳도록 들었다. 앨범 발매일 기다려서 사는 밴드였고, 나한테 없는 앨범 발견하면 몰라도 일단 사는 밴드였다. 우리 중에 김윤아를 꿈꿔 본 적 없이 자란 여자아이가 있을까. 당시 가사를 모티브로 단편 소설 습작을 하곤 했는데, 자우림의 〈일탈〉과 〈마론인형〉 가사를 모티브로 쓰기도 했다. 지금도 소설을 쓸 때에는 노래가 필수 요소로 느껴진다.
<제4장> MP3 공세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이 이루어지던 2000년대.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CD에서 음원으로,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며 내가 음악을 듣고 소비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물론 난 여전히 CD를 사 모았지만 MP3 음원을 무료로 받을 수 있던 소리바다는 무엇보다 강력한 내 서포터였다. 그런 변화의 물살 위에서 내 20대의 음악 감상은, 10대 학창시절의 연장선상에서 물량공세가 이루어진 확장, 포화기였다. 가장 많이, 가장 넓게 듣고 가장 크게 좋아했으나, 그랬기에 어느 하나에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던 시기. 하나를 깊이 파기엔 들어야 할 다른 앨범과 뮤지션이 너무 많았다. 다운로드 중인 MP3들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시시각각 몰려왔고, 난 늘 포화 상태로 듣고 쳐내기에 바빴다. 마치 택배 상하차 같았달까. 인터넷으로 조달되는 풍요로운 음원들을 먹어치우기 바쁜 허기의 시기였다. 심지어 취향에 없던 클래식이나 제3세계 음악까지 팠으니, 우주만물을 한껏 끌어 모아 내 세계의 울타리를 최대한으로 넓히던 셈이다.
돌이켜 보면 연예인을 너무 깊이 파지 말자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20대 초반, 모처럼 H.O.T 시절의 아이돌 덕력을 발휘해 좋아했던 BACKSTREET BOYS의 닉 카터였다. 당시 인터넷을 뒤지고 뒤지다 어느 순간 닉 카터의 파티 사진을 맞닥뜨렸는데, 여자들을 양팔에 거느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불편한 골짜기처럼 낯설고 두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단지 서양 셀럽들의 프라이빗 파티 같았지만, 20대 초반 유교걸이던 내 눈에 그 공간은 매우 퇴폐적이고 그는 매우 타락해 보였다. 나는 상처받았다. 앞으로 누굴 좋아해도 이런 모습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탓에 특정 뮤지션에 대한 덕질은 자제했으나 큰 맥락에서 내 음악 취향의 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자연히 소팅이 이루어지는 법. 그 시기 내 최고의 뮤지션은 RADIOHEAD로 결론이 났고 나는 다른 장르보다 브리티시록과 펑크를 좀 더 좋아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 시기에 들었던 뮤지션과 노래의 목록을 언젠가 한 파일에 정리할 날이 있을까. MP3플레이어와 벅스-멜론-스포티파이에 분산돼 있는 내 중구난방 플레이리스트. 스포티파이는 부디 영원할 거라고 믿고 싶다.
<제5장> 록페 & 세카이노 오와리 기
2010년이 밝았다. 사람 만나고 술 먹으며 방구석 리스너로 20대를 다 보내고 자취를 시작한 스물아홉. 마침내 음악 취향, 문화 취향 맞는 록음악 동호회를 만났다. 놀 시간과 돈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결속과 록페 흥행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맞물리자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오랜 세월 묵묵히 누적된 각자의 덕력이 분화했다. 그 기세로 30대 중반까지 온갖 록페스티벌과 록스타의 내한 콘서트를 정복했다. 페스티벌이 없을 땐 홍대 라이브클럽 라인업을 검색하며 평일이건 주말이건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다녔다.
이 시기에 기념할 만한 업적이라면 시나위, 넥스트, 자우림, 노브레인, 크라잉넛 등 국내 1세대 이후에 나온 2세대 인디밴드를 섭렵한 것이다. 당시 나의 공식 최애는 국카스텐이었고, 비공식 최애는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하 불쏘클)이었다. 이때가 유년기 이후로 내가 가장 신나 있던 시기일 것이다. 지금은 문 닫은 홍대 클럽 타(打)에 불쏘클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클럽 앞에서 리더 조 까를로스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세카이노 오와리(이하 세카오와)는 지산록페스티벌에서 처음 공연을 보고 노래가 좋아서 집에 돌아와 파기 시작한 일본 밴드다. 난 세카오와를 내 음악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생각하는데,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 때문이다. 지금이야 아이돌들이 세계관을 깔고 컨셉을 정립하는 경우가 많지만, 멤버들의 실제 관계성과 히스토리를 배경으로 ‘세계관’ 안에서 노래한 그룹은 세카오와가 최초이자 단독일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나무위키 세카이노 오와리 항목에서 특히 후카세와 사오리의 관계를 살펴보시라.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굴곡진 인생사와 둘의 애틋한 관계에서 가슴에 훅 치고 들어오는 영감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지식을 주입한 뒤 노래를 들으면 또 하나의 평행우주가 열릴 것이다.
현재는 멤버들 대부분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은 어른이 되었다. 세카오와 월드의 판타지는 아마도 더 이상 노래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세카오와를 안 시점이 이들의 세계관이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는 게, 세카오와 멤버들이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이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제6장> 방탄소년단 & WHITE STRIPES 기
원 없이 놀아봤다 말할 수 있는 한 시절이 끝났다. 모임도 시들해지고 록페는 망했다. 난 다시 방구석 리스너로 돌아와 일에 자아를 몰빵했다. 그런 중에 부딪친 게 방탄소년단이었다. 회사에서 다들 빌보드 다녀온 아이돌이 있다고 웅성댔다. ‘걔네 누군데?’ 나도 그랬다. ‘걔네 뭔데?’ 한 동료가 ‘노력을 많이 하는 팀’이라고 했다.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길래 싶었는데 과연.
첫 클릭을 하고 다음 클릭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쩌다 보게 된 〈I NEED YOU〉 안무 연습 영상에서 난 이제껏 내가 본 중 가장 칼 같은 칼군무를 봤다. 가사 음절 단위로 쪼개지는 동작을 보며 영상을 의심했다. 이거 2배속 아냐? 인간이 이렇게 추는 게 가능해? 그렇게 다음 클릭을 하게 되는 법.
인간이 이렇게 추는 건 가능했다. 둘러보니 방탄 안무는 다 그랬다. 인디밴드 파느라 아이돌 멀리한 지 오래 됐는데 이 정도 경지까지 올라와 있었다니 격세지감이었다. 〈불타오르네〉, 〈NOT TODAY〉 군무에서 수갑 차고, 자체 콘텐츠 보며 포승줄 묶이고, 〈화양연화〉 세계관 파며 철창 갇히고, 2016 MAMA 지민 눈가리개 퍼포먼스 보며 기절하고, 2017 MAMA 전설의 빨간 배경 〈MIC DROP〉에 육체와 혼이 분리됐다. 최애였던 지민에게 영감을 받아 부산예고 현대무용과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하이틴로맨스 소설을 썼다. 그거 쓰려고 부산에 가서 부산예고를 방문하고 동남방언을 공부하기도 했다. 죽어가던 아이돌 덕력을 소생시켜 준 방탄소년단. 이렇게 소생된 덕력이 훗날 더욱 요긴하게 쓰이게 될 줄은 그땐 몰랐지.
어느덧 방탄은 지구대스타가 되었다. 모두가 팬이 되다 보니 팬이란 게 의미가 없어질 즈음 뜨겁던 덕심은 식고 난 방탄의 꾸준한 리스너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격렬하진 않지만(이미 오래전에 해체해서) 강력하게 다가온 밴드가 있었다. 미국의 화이트 스트라입스였다. 드럼 멕 화이트와 기타&보컬 잭 화이트로 이루어진 2인조 밴드인데 드럼이 여자라는 데서 1타, 이혼한 부부였다는 데서 2타, ‘화이트’가 아내였던 멕의 성이었다는 데서 3타를 맞았다. 히스토리부터 간지가 작렬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거물 밴드라 음악은 두말할 것 없었다. 〈Ichy Thump〉를 들으며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노래는 인간밖에 못 만들 거라 생각했다. 내가 골몰했던 지점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천재성 폭발하는 기존쎄 형님 잭 화이트와 세상 조용한 콰이엇피플 멕 화이트. 둘을 나란히 대 보면 천재 뮤지션과 그냥 연주자다. 팀내 역할 비중은 9:1이나 8:2 정도? 그런데 화이트 스트라입스는 애초에 잭이 멕을 보고 영감을 얻어 탄생한 그룹이었다. 멕이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근데 음악은 잭이 다 하는, 그러니까 뮤즈를 데려와서 창작에 참여시키는 양상인데, 성격을 보면 잭이 멕을 얼마나 몰아붙였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실제로 멕이 나가떨어져서 10년 만에 해체한 건데 이 불균형의 극치가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명반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니 이건 뭐 〈위플래시〉급 아닌가. 잭이 포기해야 했던 것도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멕도 큰 부와 명예를 얻었으니 뭐 됐다만, 그걸 떠나서 예술이 과연 뭔지,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이 어때야 하거나 어떠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규정할 수 있는 건지, 공정이나 민주 개념이 과연 예술에 기여할 수가 있는지, 이 둘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뻗어갔다.
이 시기의 덕질은 좋아서 파고들긴 하나 육체를 대동하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는 아닌, 젖은 성냥 같은 화력이었다. 직장생활에 몰빵하느라 비대해지던 초자아. 거기 눌린 에고와 무의식이 살려만 달라고 외치던 것이었는지도. 여담으로 작년에 내한공연한 잭 화이트는 정말 개멋있었다.
<제7장> 스트레이키즈 & TXT 기
대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생애 전체를 복기하고 자책의 수렁에 빠진 시기가 있었다.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인생 허무를 씹으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으며 치유에 온힘을 쏟았다. 살아갈 이유나 의미까진 몰라도 의욕은 좀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 뜨는 섬네일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클릭해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생의 덕질이 시작되었다.
2023년 현재형의 사심 스트레이키즈(이하 스키즈) 현진이다. 정말 오랜만에 물욕이 샘솟는 덕질을 경험했다. 이제껏 낸 앨범을 전부 샀고 난생 처음 음방을 보러 여의도 KBS 공개홀에도 갔다. (가서 현진의 실물을 보고 손도 흔들었다.) 지금은 해외 투어 도는 공백기이지만 작년 한땐 스키즈의 스케줄이 곧 내 스케줄이었다. 그때 내 신경은 온통 포카였다. (요즘엔 포스터나 책받침이 아니라 포토카드다.) 하나둘 모으다 보니 드래곤볼처럼 물욕이 샘솟는 게 개미지옥이다. 알음알음 모은 게 10cm 두께의 A4 바인더를 꽤 채웠다. 포카가 훼손되지 않게 슬리브 따위에 끼워서 보관한다. 슬리브도 그냥 투명 비닐이 있고 홀로그램이 있으니 사진에 맞게 적절히 취한다. 포카가 훼손되지 않게 빳빳하게 보관하면서 겉면에 스티커 따위로 꾸밀 수 있는 탑로더란 것도 있는데 난 아직 접근하지 못했다.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동생을 만나 덕담을 나누었다. “우리 오래 살자.” 현진을 오래 봐야 하니 말이다.
현진은 숙소에 있는 개인 시간엔 거의 그림만 그린다. 수채, 유화 등 취미 치고는 제법 진지하다. 보다 보니 따라 그리고 싶어져서 아이패드만 쓰던 나도 드로잉북을 사서 매일 그리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또 본격적으로 하게 돼서 유화와 수채, 색연필, 마카, 오일파스텔 등 이런저런 재료를 구비했다. 사진 같은 지류를 모으다 보니 다꾸로, 다꾸를 하다 보니 콜라주 작업으로 손이 바빠졌다. 한 가지에 의욕이 가득 차니 활력이 삶 전체로 순식간에 퍼졌다. 치유되어야 하던 내가 단번에 사는 나로 전환됐다. 뭘 생각하고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눈 깜빡한 다음 순간 나는 이미 살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기 위해 살고 있었다.
TOMORROWXTOGETHER(투마로우바이투게더, 이하 투바투) 역시 현재형이다. 스키즈가 앨범 활동을 마치고 공백기에 접어들 무렵, 떡밥도 떨어지고 포카 현질에 질려 심심해할 때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하이브의 후배 그룹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 노래가 들렸는지, 난 〈0X1=LOVESONG〉을 무한 반복해 듣고 있었다. ‘길이 없었어 죽어도 좋았어’ 이 후렴구 가사에 꽂혀 주구장창 들었다. 듣는 내내 내적갈등이 일었다. ‘현진이 있잖아. 더 빠져들면 안 돼.’
그러나 내 안의 덕심은 두 그룹에게도 충분히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넘쳐났다. 난 투바투도 충분히 팔 마음의 여력이 있었고 다섯 명 멤버 이름도 이미 다 외우고 있었고 자체 콘텐츠도 어느새 다 본 뒤였다. 투바투가 대활약한 〈출장십오야 – 하이브 야유회 편〉을 몇 번을 돌려 봤는지 모른다. ‘멜뮤댄브’라 불리는 2020 MMA 〈5시 53분의 하늘에서 발견한 너와 나〉 댄스브레이크 영상을 몇 번을 돌려 보며 ‘우리 툽깅이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댓글에 몇 번이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마라맛 컨셉장인 스키즈와 무해한 동화 같은 아이돌 투바투, 투 트랙으로 즐기는 사심의 덕질로 인생은 또 버텨진다.
방탄 이후 중단했던 하이틴로맨스 소설을 다시 집필하기 시작했다. 소설 글감으로 삼을 노래를 찾으며 아이돌을 세대별로 정리하다 보니 이제서 깨달았다. 나 그동안 꽤 많이 좋아해 왔구나. 뉴진스를 보다가, 갓 더 비트를 보다가 문득문득 느낀다. H.O.T의 90년대 가요톱10 영상을 찾아보니 무대가 ‘복고주의’, ‘복고풍’ 문구와 함께 70~80년대풍으로 꾸며져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 ‘그때가 좋았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 문장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과거가 미래다.
2023년에 이 모래알 같은 진리를 얻으려고 이것들을 겪어 왔나 보다.
그래서 오래전 서태지를 앓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몇 년 전 방탄이 소생시켜준 덕력에 무릎을 친다. 혹시 모든 걸 아는 누군가가 이때를 예비했던 것일까. 학창시절 혼연일체로 익힌 덕질의 감각. 그것이 얼마나 큰 삶의 동력인지 알고 있기에, 이 시점에 다시금 덕통사고를 당하니 마치 누군가 날 도와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 에너지가 어디서 다시 생겨났는지, 덕질이란 참 신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