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글 1회
오래된 바닷가의 냄새가 났다. 나는 담벼락에 있었다. 관광객 한 무리가 지나가다 날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마치 필요할 때 적절히 나타난 웃음거리 같았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더니 걸음을 늦추며 일행과 거리를 두었다.
“응, 남자애들밖에 없어.”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여자의 귓가에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들린 책 표지에도, 여자가 책을 사던 서점 광고판에도 나는 있었다. 책이 찍혀 나오던 인쇄소, 책이 만들어지던 출판사, 원고를 쓰던 작가의 컴퓨터에도 있었다. 그 작가의 이름은 ‘새파란’이었다.
그 시각 새파란은 운전 중이었다. 아니, KTX 열차에 타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새파란은 차가 없다. 10년 전쯤, 그러니까 서른 살 때 처음으로 차를 사서 신나게 몰고 다니다 교통사고를 한번 크게 낸 뒤로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는 수리하자마자 팔고 면허증은 장롱 안에 처박혔다. 아니, 차는 폐차해버리고 면허증은 신분증 용도로만 들고 다녔다. 어쨌거나 새파란은 지금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아니, 열차는 부산행이지만 목적지는 포항이었다. 포항에 사는 남자 친구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둘은 장거리 연애 7년차였다. 중간에 헤어진 기간을 빼면 4년, 정확히는 3년 10개월차였다. 날수를 세는 타입은 아니어도 새파란은 오늘이 사귄 지 며칠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포항역에 애인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새하얀. 둘 다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었고, 그 이름들은 일종의 커플링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오는 새파란을 보고 새하얀이 빙긋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새파란은 걸어오던 속도 그대로 웃으며 다가가 버석거리는 새하얀의 품에 풀썩 안겼다. 새하얀이 새파란을 끌어안고 흔들며 귓가에 속삭였다.
“하나도 안 보고 싶었어.”
“나도.”
거기에도 내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의 문이 열렸다. 새파란과 새하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이 재빨리 새파란의 캐리어를 끌고 침실을 찾아 들어갔다. 새파란은 거실을 돌아다니며 숙소를 둘러보다 인터폰을 들고 수신음을 확인한 후 말했다.
“혹시 여기 흡연 되나요?”
‘아, 실내 흡연은 안 되시고요, 흡연구역은 1층 로비 나가시면 오른편에 부스가 있습니다.’
“1층까지 내려가야 해요?”
‘네에, 불편하시겠지만 흡연구역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새파란은 인터폰을 끊고 침실로 들어갔다. 거치대 위에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은 친절히 캐리어를 열어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새파란은 캐리어를 뒤져 전자담배를 꺼내곤 전원을 켰다. 기기에서 파란 불이 깜빡거렸다.
새하얀이 화장실에서 걸어나오며 입에서 김을 뿜는 새파란에게 물었다.
“여기 금연 아니야?”
“피워도 된대.”
“진짜?”
“응.”
“금연인 줄 알았는데.”
새하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거실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 앉아 한 개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새파란이 따라 나와 새하얀 옆에 앉았다. 둘은 동시에 입에서 연기를 뿜었다. 그 연기 속에도 내가 있었다.
안내요원 둘이 바닷가 담벼락에서 나를 지우느라 혈안이었다. 새파란과 새하얀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 그들은 선들선들 휘날리는 가벼운 복장으로 밤의 해변을 거닐었다. 가볍게 걸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옷은 여행 전 각자 심혈을 기울여 고른 새 옷이었다.
새파란과 새하얀 옆으로 낮의 그 관광객 무리가 스쳐 지나갔다. 낮에 전화를 받던 남자가 새파란을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저기, 혹시 새파란 작가님 아니세요?”
“아닌데요.”
“아… 죄송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리로 돌아갔다. 몇 걸음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맞는 것 같은데…”
옆에 걸어가던 남자가 물었다.
“누군데?”
“민아가 좋아하는 작가 있어. 똑같이 생겼네.”
그러자 앞에 가던 줄무늬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돌아보며 물었다.
“민아가 누구야?”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똑같이 대답했다.
“여동생.”
새빨간 말들이 밤새도록 바닷가 곳곳에서 내뱉어졌다. 나는 시시각각 무수히 생겨났다. 담벼락의 낙서를 지우던 안내요원 둘은 어느새 화장실 외벽으로 이동해 있었다. 어디에나 내가 있었다. 나는 도시를 거미줄처럼 점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