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모든 손절친들에게

#에세이

by 당최

부제: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20221125



EP1. 녕


1999년 중경고등학교 1학년 10반 교실에서 널 처음 만났다. 아마 네가 내 뒷자리이거나 앞자리였을 거다. 첫 학기는 자리가 가까운 친구들과 시작되고 우리도 내내 같은 그룹으로 묶여 지냈으니.


키가 크고 늘씬한 네가 부러웠다. 넌 학교 밖에선 탈색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어른들이 입는 정장도 입던 날라리였지만 학교 안에서는 있는 집 자식에 공부도 좀 하고 성적도 좋은 애였다. 고2 내내 방과 후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니던 내겐 넌 다 가진 애로 보였지만 네가 뭔가 만족해 하던 모습은 기억이 안 나. 말라빠진 팔을 내밀어 보이며 살쪘다고 투덜대던 네 모습이 이토록 오래 남아있는 걸 보면.


나는 내게 어떤 존재였을까. 널 인생에서 쳐낸 후에도 여러 사람에게 이 질문을 품었다.


우리가 정말로 친해진 건 고3 때와 졸업 이후였다. 아마 고3 때쯤 너네 집이 망했을 거야. 너는 부족함을 알게 됐고 얼굴에 그늘이 생겼지. 어쩌면 그래서 우리 사이에 진짜로 말이 통하는 경로가 하나 생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3이라 힘들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수험생 시절 그냥 답답한 날이 있어서 우린 한강에 갔다. 당시 너는 당연히 SKY가 목표였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집이 서울이니 인서울이 목표였다. 어둑한 저녁 하늘을 뒤로하고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네가 말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건 견디겠는데 경제적으로 힘든 건 못 견디겠다고. 내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있어본 적이 없어서 새삼스럽게 힘든 기분을 몰랐거든.


다른 대학을 가고 우린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됐다. 볼 때마다 넌 어딘가 비밀스럽고 슬픈 분위기를 풍겼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넌 바로 어른이 된 여성 같았고 난 아직 여자아이 같았다. 얼마 후 ‘헌’이라는 남자가 너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고, 우리 만남도 너와 헌의 관계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던 너, 널 잡지도 놓지도 않던 그 나부랭이 얘기를 넌 추상적인 어휘들로 줄기차게 쏟아놓으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대체 내가 뭘 알겠니. 찌질함 외에는 그 나부랭이의 캐릭터도 파악이 안 되던걸. 나는 있지, 녕. 그저 네 앞에서 허겁지겁 듣고 부랴부랴 답안지를 만들어 올리던 타인이었다.


한번은 이제 완전히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네가 다시 만나야겠다며 어떡할까 내게 물었다. 나는 사실 의견이 없었지만 반대했다. 이유는 ‘산뜻하지 못해서.’ 넌 후에 그 이유를 비난했지. 너의 비난은 옳았어. 그건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너에게 내가 들어줄 만한 결말을 내라고 요구할 순 없는 거다. 하지만 난 질리는 기분이었다. 산뜻한 결말과 함께 우리 사이를 뒤덮는 헌 얘기를 그만 쫑내고 싶었다. 헌이라면 지긋지긋했으니까.


아마 나도 네 이야기에 대응하는 짝사랑남이나 썸남에 관해 종종 풀어놨을 거다. 적어도 나에겐 그게 헌보다 더 중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넌 듣자마자 다 알겠다는 듯 뚝딱뚝딱 결론을 내곤 이렇게 저렇게 하라 지시했다. 그걸로 끝. 난 늘 어려웠는데 넌 무척 쉽게 하더라. 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혹시 내가 너에게 했던 대답들도 너에게 그렇게 들렸을까. 내가 자세한 사정을 들려주지 못했던가. 못하긴 했다. 우리가 만난 시간 대부분은 헌 얘기에 할애되었으니까.


너에게 휴지기를 갖자고 말한 날 나는 이야기가 잘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일기에 청승맞은 문장들을 썼다. ‘고마워. (중략) 나 같은 고집불통 이해하려고 해줘서. 사랑해. 사랑하니까 서로에게 지쳐서 죽기 전에, 서로를 증오하게 되지 않게 하려고 (중략) 미안해. 껄끄럽더라도 조금만 네게 암시라도 주었더라면 이렇게 끝까지 와서 이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중략) 다음에 만날 땐, 이젠 어느 것에도 서로에게 상처받지 말자.’ 그리고 바로 며칠 뒤에 이렇게 한마디 썼다. ‘왜 이렇게 참질 못하니.’


날 필요로 하는 너를 밀어내지 못했다. 휴지기는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었다. 난 소화불량 상태로 계속 꾸역꾸역 너의 얘기를 듣다가 결국 체해 버렸다. 고장 난 네 친구는 너에게 더 이상 볼 수 없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EP2. 비


명지대 철학과 02 산소학번이었던 우리. 주변 눈치 보며 하라는 건 일단 다 하는 나와, 분위기를 주도하며 주위 사람을 꼬드기는 너. 이 둘이 만나니 환상의 콤비였다. 몇 년간 신입생을 받지 못하고 사양하던 철학과를 술판으로 만들며 우리는 모처럼 후배가 생긴 선배들에게 좌*비 우미라가 되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고 너도 술을 좋아하고 우리는 꽐라가 되고 우리가 꽐라가 되면 모두가 즐거워졌다. 좌*비 우미라는 어딜 가든 주인공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서있으면 늘 뭔가 아쉬웠다. 그럴 때면 공식처럼 넌 내가 원하던 말을 건넸다. “술 먹을래?” 고갈비든 거품이든 엄마손 떡볶이든 안 가본 학교 앞 술집이 없고 우리가 술을 먹으면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주섬주섬 찾아왔다. 술이 약한 나는 부지기수로 취하며 다음 날 웃고 떠들 후일담을 생산했다. 마치 그게 내 역할이란 듯.


2학년 2학기, F가 6개가 떴다. 등록금을 낸 한 학기가 날아갔다. 넌 그 정도의 파산을 맞은 적은 없었지. 난 손해를 계산하게 됐다. 남 탓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네가 존재하는 한 내가 이 생활을 청산할 수도, 적당한 선으로 조정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너는 하자고 하는 사람이고 나는 하자면 하는 사람이다. 너는 나에게 휘둘리지 않지만 나는 너에게 휘둘리는 사람이다. 그게 이 관계의 정의고 우리 과의 상식이었다. 이걸 조정하려면 난 모두를 배신해야 했다. 불가항력이 필요한 시점. 왜 휴학만이 답인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난 너와 끊어지지 않고 거리만 벌리기 위해, 오로지 그 이유로 1년 휴학을 했다.


네가 4학년이 되었을 때 난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3학년으로 복학했다. 그러나 함께 있으니 함께하던 때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난 여전히 너의 “술 먹을래?”를 잘 거절하지 못하겠더라. 고향에 돌아오면 사투리를 써야 하는 것처럼, 습관을 버리고 단박에 ‘변했다’는 평가를 받는 건 두려웠다. 너를 들어주면서 나까지 챙기는 법은 요원했다. 난 그저 네가 나를 ‘변했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때 난 고등학교 동창 ‘송’이 유학 중이던 필리핀 세부로 한 달 여행을 잡았다. 그것도 너랑 떨어져 있으려고 한 건데 너도 가겠다고 나섰다. 해서 1~2주는 너와 둘이 숙소를 잡고 3~4주는 송의 집에 묵기로 했다.


너랑 둘이 보낸 2주 동안엔 뭘 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별 기억이 없다. 우리 둘이 백화점에 가서 따로 구경하다가 내 휴대폰에 문제가 생겨서 다시 만나는 데 애를 먹었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맘 놓고 짜증을 내던 너와 네 기분을 맞추기 위해 쩔쩔매던 나. 다음 날 아무렇지 않던 너와 싸늘해진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네 분위기에 맞춰 또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던 나. 우리가 싸우면 나는 송에게 가버리면 되지만 넌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싸울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좋았던 건 숙소에 창문 에어컨이 있었다는 거. 그게 1~2주차 기억의 전부다. 공항에서 널 보내고 돌아올 때 미안하지만 후련했다. 최선을 다해 힘든 일을 치러낸 기분이었다.


난 송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방 두 개짜리 집에 송의 태국인 남자친구 ‘조’, 조의 남동생 ‘헤’까지 세 명이 살고 있었다. 송의 친구 두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합류해 순식간에 손님이 세 명이 됐다. 3주차는 정말 복작복작했다. 송/조/헤는 안방에, 손님 셋은 작은방에 꽉꽉 채워 묵었다. 우리는 번화가의 쇼핑몰도 구경하고, 빈티지샵에서 옷도 사고, 산 페트로 요새도 가고, 병아리와 눈 마주치며 발롯도 먹어보고, 야시장에서 돼지껍질 튀김도 사먹고, 뷔페에 가서 배터지게 먹고, 귀가할 때면 아파트 앞 리어카에서 파는 파인애플도 사먹고, 배달음식비를 내가 낸다고 “I’ll pay!”를 외치며 페소도 내고, TV를 보며 타갈로그어도 배우고, 레코드 가게에 가서 필리핀 인기그룹 O-zone의 앨범도 사고, 게이바도 가보고, 화이트비치에 가서 바나나보트도 타고 스노쿨링도 했다. 송은 그 시기에 ‘스노화이트’와 ‘쫄랑이’라는 강아지 두 마리를 입양했는데 아침에 눈 뜨면 거실에 싸놓은 똥을 누가 치울지 눈치게임이 벌어졌다. 친구들이 와서 장기간 머물자 불편했던 조는 안방에서 송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그동안 친구들은 작은방에서 숨죽이고 있었지. 송의 친구 둘도 돌아가고 나만 남았을 땐 송과 내가 한 방을 썼다. 후에 조는 방문한 친구들 중 내가 제일 괜찮았다고 소회를 전했다. 2주 동안 손님과 함께 살아야 했던 조/헤 형제에게 평안을.


난 네가 거추장스러웠다. 넌 짐이었고 불청객이었다. 그 마음을 숨기려고 부단히 애썼다. 너한테는 나밖에 없다는 게 물리적인 현실이었으니, 나에겐 널 최우선으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우리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면, 그 2주를 회복의 시간으로 현명하게 썼다면 다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다. 문제는 즐겁지 못했던 거지. 그러니 네가 아니었다면 한 달 내내 송의 집에서 숙박하며 숙소비를 아꼈을 텐데 하는 계산마저 돌아갔던 거지. 1~2학년 때 같으면 그저 우린 여행 궁합이 안 맞네 하고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땐 아니었다. 난 너에게 지쳐 있었고 필리핀 여행은 우리의 종점 같았다.


귀국과 함께 여름방학은 끝났고 2학기 개강하던 날부터 난 너를 외면했다. 너 하나를 외면하기 위해 모두와 단절하고, 널 끊기 위해 전부를 끊었다. 너와 헤어지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그래야 너도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네가 치러야 할 것들을 치러낼 테니까.


필리핀에서 먼저 돌아가던 것처럼 넌 등을 보이며 먼저 졸업했다. 그제야 난 자유로워졌다.



EP3. 숙


우린 대학 때 은밀하게 친밀해졌다. 고딕 소녀 같던 너에게선 어둠의 포스가 풍겼고 그 포스가 내 안의 어둠의 자식을 자극했다. 뭐, 캐릭터의 독특성이 부각되는 건 입학 초반이고 후반에 가면 다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어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기 마련이다. 우리의 시작이 그랬다는 얘기다. 난 너에게 끌렸고 얘기를 나눠보니 역시나 넌 뭐가 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 구비구비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졸업하고 넌 이름을 바꿨다. 숙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 좀 고전적이긴 했어. 한동안 뜸하게 지내던 우린 어느 날 다시 만났다. 난 출판사 다니며 연남동에서 자취할 때였고 넌 방송작가로 일하느라 상암동으로 출근할 때였다. 또한 난 남사친이었던 ‘용’과 아수라를 겪은 후였고 너는 남자친구 ‘홍’과 홍역을 치르던 중이었지. 용이나 홍이나 우리 둘 다 아는 대학 동창들이라 척하면 척이었다. 너와 나는 점점 각자의 생활권 안으로 들어왔다.


넌 상암동이 멀어서 출퇴근이 힘들다며 방을 얻어 자취를 나왔다. 그 결정에 연남동에 사는 내 지분도 있었을까 괜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린 좀 더 쉽게 자주 아무 때나 만났고, 만나는 장소가 서로의 집이 되면서 대화도 더 내밀해졌다. 원래도 은밀했던 사이였으니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넌 일하다 만난 유부남 모씨와 연애를 시작했다. 동호회나 소모임에서 썸남을 전전하던 내 상황은 테이블에 올릴 계제도 안 되는 압도적인 소재였다. 모씨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야기하는 네 표정도 점점 비장해졌다. 넌 어느새 햄릿이 되어 비극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비비언 고닉의 엄마가 아빠의 장례와 애도 기간에 하던 짓 말이다. 한 순간도 풀어지지 않고 사느냐 죽느냐의 우울함을 음미하던 네 앞에선 지나가는 가벼운 농담도, 실소도 허용되지 않았다. 네 방은 늘 우리가 연달아 피운 담배연기로 매캐했고, 나는 담배연기보다도 네가 풍기는 무거운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네게 매료되었던 어둠의 포스에 말이다.


사느냐 죽느냐까지 가는 문제를 포함해 우연한 사고의 연속인 인생사에서 개중 어떤 일을 먼저 겪어봤다는 게 우위의 근거가 될 순 없다. 다만 그때의 난 삶을 경량화하고 싶었다. 어떤 일을 겪든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삶도 무심하게 계속된다. 비극은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너무 생생한데 말이다. 그래서 어떡할까. 최고의 불행을 삶의 본질이라 생각하며 전 생애를 평준화시켜야 할까. 인생을 한 편의 극으로 완성시켜야 할까. 《상실의 시대》 같은 걸 보던 때에는 그게 가능할 것도 같았다만 너의 관객 노릇은 숨이 막혔다. 무거워 죽겠다고 내 안에서 누가 계속 외쳤다. 연기 그만해. 네가 내 앞에서 공연할 배역은 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숨 쉴 틈, 그것뿐이었다.


또다시 걸려오는 네 전화. 나는 이게 통할까 조마조마하며 농담과 웃음을 섞어 대화에 임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날카로운 반응. “언니는 내 얘기가 웃겨?” “웃겨서가 아니라 웃으면서 하는 거야.” 넌 내가 숨 쉬는 꼴을 못 보고 난 네 무거운 공기를 못 견디고. 척하면 척이던 우린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대가 되었다. 너에게 구비구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법을 난 알지 못했다. 너에겐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며칠 후 넌 다시 내게 전화했다. 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지만 그 전화를 끝내 받을 수 없었다. 그 뒤로 넌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EP4. 뎅


우린 고3 때 같은 반이 되어 처음 알았다. 자리가 멀어서 금방 친해지진 않았지. 먼저 다가온 건 너였다. 난 CD를 한 움큼씩 들고 다니며 쉬는 시간마다 책상 위에 쌓아놓고 들었는데, 넌 내 자리로 와서 뭐 듣냐, 이건 누구냐, 이 앨범 사진은 왜 이러냐 하며 귀찮게 말을 걸었다. 난 이어폰을 뺐다 끼웠다 하며 빠짐없이 대답했다. 아마 네가 귀여웠던 것 같다.


우린 같은 반 친구로 잘 지내고 졸업 후엔 싸이월드 같은 걸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러다 블로그로 넘어왔을 때였나. 난 뜬금없이 주소를 알려주면 편지를 보내겠다는 포스트를 올렸다. 넌 주소를 보냈고, 난 편지를 보냈다. 그걸로 우리의 편지의 시대가 열렸다. 다이어리와 손편지에 열광하던 시기, 난 잡지 PAPER를 비롯해 손에 들어오는 온갖 인쇄물을 오리고 붙이며 뭐든 열성으로 꾸며댔다. 내가 보낸 수많은 편지는 그러한 가내수공업 창작물이었고, 네가 보낸 편지들도 못지않은 과정을 거친 장인의 수공예품이었다. 이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선의의 경쟁, 손편지에 진심인 자만이 나눌 수 있는 혼신의 우정. 네가 없었다면 난 그것들을 어디로 보낼 수 있었을까.


나랑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뚤’, 고1 때 같은 반이었던 후로 친하게 지내던 ‘씰’까지 우리는 네 명으로 완전체가 됐다. 씰과 뚤은 애저녁부터 넘볼 수 없는 절친이었고 너는 씰과 각별했다. 씰이 가족 문제로 집을 나와 몇 달 동안 너네 집에서 먹고 자고 할 때 넌 씰이랑 같이 지낸다고 마냥 좋아했었다.


우리 완전체는 1년에 한 번은 꼭 함께 2박 3일 이상의 일정으로 여행을 했다. ‘내일로’ 청년 티켓을 끊어 기차로 전국일주도 하고, 겨울엔 통나무 산장에, 여름엔 계곡 산장에 갔다. 바다도 가고 섬도 갔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완전체가 모여 심사를 했다. 좋아하면 뒤도 없이 좋아만 하는 넌 네 명 중 연애 경력이 가장 화려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늘 남자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그 또한 우리 완전체 안에 맴돌던 레퍼토리였지. 추억은 근면성실하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너와 씰, 뚤이 차례차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난 혼자 한국을 지키다 이따금 일본에 방문해 완전체를 이루곤 돌아왔다. 넌 지금도 일본에서 보낸 그 몇 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배웅해준 ‘은’이 너에게 전 재산을 털어 건네준 5000엔. 그 빚 때문에 앞으로 ‘은’이 살면서 너에게 정말정말 나쁜 짓을 해도 한 번은 넘어갈 수 있다고.


내가 연남동에 나와 살기 시작하고 얼마 후 너도 연남동에 방을 얻었다. 우린 동네 친구가 됐고, 오래전 손편지가 그랬듯 연남동 시대가 열렸다. 난 내가 자주 만나는 록음악 동호회 ‘락당’에 널 데려갔고 넌 금세 필수 멤버가 되었다. 신나게도 놀았다. 우린 주말이건 평일이건 할 것 없이 홍대 라이브클럽을 쏘다니고 온갖 록페스티벌과 콘서트를 쑤시고 다녔다. 그 와중에 넌 야무지게도 ‘석’이랄지 ‘윤’ 같은 인디밴드 뮤지션과 사귀었다. 그루피의 위치를 인내하며 마침내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던 너를 대단하다 느꼈다. 난 도저히 못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공연장의 관객에 머물고 너는 술자리에서, 작업실에서, 연습실에서, 행사 가는 차 안에서 그들과 함께일 수 있었지. 넌 우리 모임에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자리에 우릴 불러 앉히며 양쪽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네 오지랖 덕에 흥청망청 섞이는 자리들이 즐거웠다.


뮤지션을 사귀는 대가를 너는 직접 겪었고 나도 네 덕에 잘 알게 되었다. 네가 겪던 부작용의 상당량을 내가 받아냈다고 자신 있게 말해본다. 모임이 파하면 정례처럼 넌 남아서 내게 석의 찌꺼기들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그럼 난 석을 욕하고 증오하고 잘근잘근 씹어대며 널 끌어올렸다. 그럼 넌 다시 석과 한동안 잘 지냈지. 그 뒤에 석을 만나면 남몰래 죄책감이 들었다. 그걸 얼마나 반복했는지는 너도 나도 모른다.


난 탈진하기 전에 너에게 휴지기를 요청했다. “나는 섬인데 네가 자꾸 배를 타고 와서 내 섬에 구토를 하고 돌아가니 섬을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린 6개월쯤 후에 다시 만났고 너는 석과 헤어졌다. 그 뒤에 만난 윤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결국 헤어지긴 했지만 그 사람을 만날 때의 너는 날 괴롭게 만들지 않았다. 그건 그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뜻이었다.


뮤지션과 어울릴 때 주의할 점이 또 있었다. 경외와 선망으로 그들이 내 친구들의 지위를 넘어서지 않게 해야 했다. 일본에 제일 늦게까지 체류하던 씰이 드디어 귀국해서 완전체로 모이던 날, 너는 그 자리에도 뮤지션을 불러들였다. 아니, 하이에나처럼 아무 술자리를 찾아다니던 그들이 거기 온다 하니 그러라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뮤지션이 온다는 건 곧 그들이 주인공이 된다는 뜻이다. 씰과 뚤은 못 견디고 나가자고 했고 난 둘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너는 정리하고 갈 테니 먼저 가있으라 했고, 끝내 오지 않았다. 씰과 뚤은 그날부터 너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실은 나도 아슬아슬했지. 그들이 오게 놔두는 너를 막지 않고 놔뒀으니. 그래서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네 다음 남자친구는 직장 동료 ‘완’이었다. 완은 락당에 잘 적응해서 필수 멤버로 활약했다. 누구에게나 싹싹하게 잘했지. 나도 완을 무척 좋아했다. 네가 완에게 손찌검을 당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내 안에서 완은 개새끼가 되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너는 나한테 울고 나서 완을 다시 만났다. 내겐 중노동이 시작됐다. 완에게 겉과 속이 다른 연기를 해야 했다. 넌 결국 완과 헤어졌지만 락당 엠티를 가서는 연애할 때와 다름없이 완을 대했다. 뎅은 완을 계속 만나고 싶은 건가. 손찌검 당했다며. 그래도 만나겠다는 건가. 난 혼란스러운 생각마저 접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너 알아서 해라. 친구란 게 원래 변기통이지. 서로서로 변기통 해주는 거지, 뭐. 넌 직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패밀리였는데 완은 그 패밀리 멤버였다. 그래, 헤어진 뒤에도 계속 봐야 할 사정이 있겠지. 오케이. 너는 그들과 미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응, 잘 다녀와. 다녀온 너는 여운에 들떠있었다. 그래, 좋았겠네. 그리고 내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씰과 뚤이 조문을 와서 술을 진탕 먹고 너에게 전화했다. 내가 상 치르는데 네가 와야 하지 않겠냐고. 시차 적응이 덜 된 너는 잠결에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고 결국 오지 못했다. 문자 위로도, 부고문을 올린 페북에 위로의 댓글도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조모상이야 별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지. 미국 여행의 여운을 깨서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얼마 뒤 락당의 한 동생이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페북에 올렸다. 넌 절절한 위로의 댓글을 남겼다. 그래, 당연히 위로해 줘야지. 고양이의 죽음은 가족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지. 얼마나 슬프겠어. 나의 뇌관을 건드린 건 다시 얼마 뒤에 온 너의 문자였다. 윤의 밴드 멤버였던 ‘태’의 부친상을 직접 알리며 태에게 위로의 문자라도 한 통 보내주라던 그 문자. 난 일단 태에게 위로 문자를 보냈다. 부모의 죽음은 재난 같은 일이니까. 고작 서른몇 살 먹은 남자애가 얼마나 힘들까. 왜 이렇게 다들 죽을까. 연민이 느껴졌다.


그다음에 너와 나를 생각했다. 내내 궁금했던 네 안의 나의 지위가 이렇게 드디어 밝혀지는구나. 너에게 난 전 남친의 동료보다도 덜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들거리던 며칠 동안 넌 분위기를 감지하고 쩔쩔맸다. 난 네가 쩔쩔매는 것을 멈춰주기 위해 결론을 내렸다. 말을 정제해서 긴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순화해도 요지는 잔인했다. ‘네 친구들이나 잘 챙겨. 다 떨어져나가기 전에.’



EP5. 당최


이 네 가지 서사를 연극이나 드라마 각본이라 치자. 내가 녕과, 비와, 숙과, 뎅과 관계를 유지하는 해피엔딩으로 바꾸려면 어느 대목을 수정해야 할까. 이 문제에 수없이 골몰했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평소에 미리 말했어야지. 쌓아놓지 말고 그때그때 풀었어야지. 다 받아주며 의지하게 만들어놓고 힘들어지니 무책임하게 내뺀 거잖아.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 할 만큼 했어. 친구들이 경고를 경고로 받고 적당히 했어야지. 걔들이 날 배려했어야지.


이런 비난은 길 가던 사람도 할 수 있다.


고프먼의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본다. 난 왜 무한정 들어주는 너그러운 관객 역할을 자처했던가. 참고 인내하며 다 받아줄 수 있을 것처럼 연기하던 난 그로써 어떤 위상을 획득하려 했나. 내 배역에 어떤 가치를 부여했던가. 왜 그 가치에 가치를 부여했던가.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나. 난 무엇이 되고 싶었나.


들어주는 사람.


초등학교 2학년 땐가 엄마가 외출한 사이 설거지를 해놓은 적이 있다. 평소 엄마가 설거지하던 모습을 따라 그릇을 닦고 배수구에 고여 있는 음식물 찌꺼기도 맨손으로 말끔히 비워냈다. 칭찬받고 싶었다. 엄마가 돌아와서 보고 당연히 호들갑스럽게 칭찬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씩 웃고 별말이 없었다. ‘난 매일 숱하게 하는 일인데 어쩌다 한 번 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나중에 생각해보니 엄마의 표정은 그거였다.


자식의 인정욕구를 속 시원히 해소시켜주지 않는 타입의 부모 아래 내향형 기질을 타고난 나는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떨지 않는 아이, 말없고 조용한 quiet people로 자랐다. 나한텐 말을 하는 게 참 큰일이었다. 중학교 때 운동화가 다 떨어져서 매일 양말이 젖고 발바닥에 티눈이 없어지지 않던 적이 있다. ‘새 운동화가 필요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결론인데 난 참 오래도 생각했다. 큰마음 먹고 엄마에게 운동화 사 달라고 말했다. 후딱 해치우려고 학교가기 전 현관에서 그 망가진 운동화를 신으며 말했다. 엄마는 ‘사 달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안 된다’고 해놓고 추이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럼 동생은 징징대며 몇날 며칠을 졸라 결국 얻어내는 타입이었지만 나는 발이 부스러질지언정 두 번 다시 말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엄마는 보다 못해 운동화를 사주긴 했을 것이다. 근데 내가 졸라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 게다가 요구한다는 건 너무 어려워서 두 번은 못 할 일이었다. 요구와 협의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현장에서 나는 능력 미달의 배우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관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그나마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배역이니까. 그러나 내가 바란 이상적인 자아가 과연 관객이었던가. 남 얘기 들어주려고 태어나는 사람 없듯이 나도 실은 나 잘났다 떠들며 살고 싶은 보편적 욕망의 화신이다.


욕망은 결핍에서 온다. 왜 글을 쓰게 됐느냐는 물음에 난 열다섯에도, 스물다섯에도, 서른다섯에도 한결같이 ‘말을 못해서’라고 대답해왔다. 어쩌면 내가 들어주던 시간은 묵묵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암묵적 요청이었다. 친구들 앞에서 들어주는 사람을 연기하던 나야말로 내 얘길 들어줄 안전한 사람이 너이길 원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안심하고 편하게 털어놓을 상대가 되어주고 있는지 알지? 너도 나한테 꼭 이렇게 해.’ 그러나 관계 전방위로 작용하던 나의 투사를, 이 음소거된 판타지 모노드라마를 친구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코미디가 따로 없다.


1년 전 공황증으로 제정신이 아닐 때 난 뎅에게 다시 연락했다. 약 5년 만에 만난 뎅은 프로 공황러 선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우리 관계가 안전지대임을 주지시켰다. 아직 남아있는 게 있다면 풀릴 때까지 몇 번이라도 반복해 사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난 널 놓지 않을 테니 도망가려 해도 늦었다고 말했다. 좋으면 뒤도 없이 좋아하기만 하는 예의 용감함 그대로.


녕도 나를 이렇게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고 떨어져있는 시간을 못 견디고 이어 붙여야 했을 것이다. 비도 나를 이렇게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거리를 두는 내가 불안해 필리핀까지 쫓아왔을 것이다. 숙도 나를 이렇게 좋아했을 것이다. 나에게 판단당하지 않을 거라 믿고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들을 끝없이 털어놨을 것이다.


모든 게 내 탓이 되던 밤들이 있었다. 이젠 그때의 어리석음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너희가 볼 때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미세하게, 그때보다는 나은 인간일 것이다.


진짜 상호작용으로 나아가라 따위의 문장을 쓰다 집어치웠다. 이 글은 앞으로 어떤 바람직한 삶을 살지 따위의 통찰로 맺음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고프먼도 이쯤에서 보내버리자. 이 단락은 오로지 너희를 위한 글이다. 날 너무 좋아해서 내게 버림받은 너희를 내 안에 정확한 곳에 기념하기 위한 결말이다. 그 시절 너희를 통과해올 수 있어 감사했다. 내 곁에 머물다 가줘서 고마웠다. 큰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 이제 남아있는 게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우리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이 되었다. 모두들 그 시절을 떠올릴 새 없이 지내고 있겠지. 혹여 이따금 여전히 괴롭게 쳐다봐야 하는 잔해가 떠오른다면, 이따금 발에 따가운 손톱 조각이 밟힌다면 그마저도 너드커넥션의 노랫말처럼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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