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3680 소나타

#에세이

by 당최

20250614


가수 비비가 신동엽의 짠한형에 출연한 유튜브쇼츠를 보았다. 비비는 자신이 아이를 갖고 싶은 이유가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신동엽이 물었다. “그게 자식일 것 같다는 거지?” 한 줌의 대화가 이어진 뒤 비비가 다시 말했다. “걔는 또 왜왜왜 날 낳았냐고 따지겠죠? 그럼 뭐라고 말해줄지 고민도 해보고.” 그러더니 대답을 정했다. “난 그냥 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이렇게 말해줄 것 같아요.” 비비는 보고 싶었던 자식을 출산하는 걸 소환식이라 명명했다. 쇼츠 댓글창에 인류애가 넘쳐흘렀다.


최근 근황이 출근이다. 15년가량의 직장생활 이력이 무색하게 몇 년 공백기를 거친 뒤의 직장생활은 긴장도가 높다. 그러나 몇 주 지나니 그것도 익숙해진다. 1주차에 비해선 2주차가, 2주차에 비해선 3주차가 긴장이 덜하고 눈 떠보니 어느새 4주가 지나 있다. 이런 식이면 직장이란 공간과 출퇴근 행위도 어느 땐가 의식의 뒷배경으로 물러날 것 같다.


내게 각인된 직장 트라우마의 출처는 한 군데로 특정되지만 그때의 기분을 일으키는 요인은 회사라는 배경 전체에 먼지처럼 꽃가루처럼 날아다니며 재채기와 알러지를 일으킨다. 정신적 백혈구들이 회사의 공기를 아직 이물질로 간주하는 듯하다. 아침마다 이물질의 세계로 나서며 심호흡을 하는 한편 퇴근해서 집으로 올 때도 왠지 이질적인 외지로 떠나는 기분을 느낀다. 사람에 치이는 지하철 안에서 오락가락 난감한 기분의 정체를 곰곰이 사색한다. 나의 내지는 어디일까. 이따금 허구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의 집 주소는 어디일까. 얼핏 떠오르는 장소나 공간은 있지만 끝까지 추적해보면 종착지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재개발된 어린 시절 동네처럼 말이다.


얼마 전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살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부모님이 노년이라는 팩트에 내려앉으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시간이 더 이상 남지 않기 전에, 재난 같은 게 발생해 억지로 끌려들어가는 형국이 되기 전에, 내면 아이가 그저 ‘엄마,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어른이 소원을 들어주는 모양새를 꾀해보았다. 먼 훗날 할 수 있었으나 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고 싶다는 제법 진지한 사유도 챙겼다. 어떻게 돼도 후회는 하겠지만 그 양이 감당 한도를 초과하지 않을 만큼, 내면 아이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을 만큼만 되게 말이다.


그러나 어른은 겁이 많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랑 양껏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게 나만의 욕망일까 두려웠다. 과연 엄마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두 팔 벌려 받아줄까. 어린아이는 그러한 완벽한 그림을 소망하지만 어른의 손으로 혼자 산 세월을 세어보니 16년이었다. 이제 와 부모의 생활반경에 불쑥 끼어드는 것이, 평온한 노후의 삶에 먼지나 꽃가루 같은 이물질로 침입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환영이 우러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뾰족뾰족 두려웠다.


먼지처럼 스며든다 해도 시간이 갈수록 불편한 하숙생이 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한집에 살면 못 견뎌 뛰쳐나오고 싶은 순간을 몇 번은 맞이할 것이다. 20대 때 연남동으로 뛰쳐나온 이유든 40대에 새로 생길 모종의 이유든, 그리움과 별개로 한집에 살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지금 내가 그걸 참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는가도 저울질해야 했다. 17평 아파트를 꽉 채우도록 축적된 살림을 정리하고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 때 지내던 좁은 방에 들어가 살 일도 막막했다. 어린아이는 그에 대한 대책은 없다. 아이는 욕망할 뿐 판단과 수단 강구는 어른이 해야 한다. 난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원하는 게 진정 회귀인지.


지난달 5월, 집 근처 이마트에서 가슴에 썰물이 이는 순간이 있었다.


오래전 부모님 집에 살 적 엄마는 밤 10시까지 마트 일을 했다. 퇴근한 아빠와 학교 마치고 귀가한 나는 9시쯤 엄마가 일하는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곤 했다. 이따금 남동생도 함께였다.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다 보면 정육코너에서 판매원복을 입은 엄마가 “왔어?” 하며 얼굴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럼 아빠는 어영부영 계산을 한 뒤 빈 박스를 조립해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고 번쩍 들어 주차장으로 갔다. 난 박스를 들고 가는 아빠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트렁크에 물건을 싣고 나서 차 안에 하릴없이 있다 보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엄마가 차창으로 보였다. 엄마가 보조석에 올라타 척 하고 차문을 닫으면 비로소 하루가 끝난 기분이었다. 가족은 각자 보낸 하루를 떠들어대며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동행하는 자식이 있든 없든, 장을 보든 안 보든 아빠는 엄마의 퇴근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지했다.


지난달 혼자 이마트에 간 이유는 조카들의 어린이날 선물과 엄마, 아빠의 어버이날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혼자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며 선물을 고르고 먹거리도 담아 무인계산대에서 값을 치르니 종량제봉투 2개가 묵직했다. 양손에 가득 들고 혼자 차로 돌아와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던 순간. 기어를 D로 옮기고 차를 빼던 순간. 핸들을 꺾으며 마트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순간. 그 순간들이었다. 아빠가 박스를 번쩍 들고 차로 걸어가던 뒷모습이 떠올라 사무치던 게.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하루치 고생담을 신나게 풀던 엄마 아빠의 뒷모습이, 때론 둘이 뭔가 틀어져 냉기가 쌩쌩 불던 그 차 안의 공기가 그리워 미치겠던 게. 아빠 차는 소나타였다. 그 소나타는 18년간 가족을 싣고 나르다 올해 폐차했다.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보낸 3680 소나타와 그 뒷좌석에서 바라보던 별것도 없는 풍경이 생각나 눈물이 뚜룩 떨어졌다.


그때가 제일 행복했나봐. 하고 아반떼에 떨어지던 눈물이 읊었다. 거짓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친절을 베풀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을 수납하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구겨진 사진들을 보며 이게 다였나 갸웃하던 자의 기억. 인내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온 사람이 급기야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고 싶어지게도 만들었던 절반의 기억. 거짓이었다. 삶은 일부분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무거운 인과가 가라앉고 물 위에 동동 뜬 껍질들. ‘마지막으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느끼고 싶다’는 클리셰는 그 껍질들의 발상이었다. 치대고 뻗대고 투닥대면서 생활감을 함께하는 밀착 관계 안에서 불안정 애착을 해소하라는,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 공허를 채우라는, 가슴속 구멍을 메울 막다른 존재인 부모를 소환하라는 외침들. 난 가만히 듣는다. 들어본다. 들어준다. 듣기만 한다. 구멍 안에 메아리가 끊임없이 울린다. 나는 여전히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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