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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Year)와 달(Month)과 겨울

12월 하나

by 당신


어제는 내가 사는 도시에 눈이 내렸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이 해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이나 보신각 앞에서 북소리를 들을 테고. 그러면 또 한번, 아직 멸망하지 않은 세계가 우리 앞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다. 이 복잡하고도 고요한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밝아올 때면, 황망한 기분이 들곤 했다. 1999년 12월 31일에 세상이 끝나지 않은 게 아쉬운 사람처럼, 타이머가 그저 리셋되듯이, 매년 비슷한 허무함이 찾아온다. 아, 또 한번의 365일이, 그리고 6시간이, 내게 주어지는구나, 내가 견뎌내야할 혹독한 계절들을 다시 살펴본다.


우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또.

멸망하는 지구에 대한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보는 것조차 두려우면서도,

왜 온 힘을 다해 시간이,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를, 이 세상의 멸망을 고대하게 되는 건지.


한참 시를 쓰던 고등학생 때는 내가 서른 넘어서까지 별 일없이 살아남을 줄 몰랐다. 실비아 플라스처럼 가스관을 쥐고 애저녁에 죽었을거라고 생각했다. 근대 사회의 시인들처럼 빈곤과 가난과 약에 찌들어 살면서, 세상에 몇 개의 천재성만 세상에 남기고 죽었을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내 글만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당대의 내가 존경하던 시인들도 다 자기 생을 좀먹고 있을거라고 여겼다.


그 시절에는, 내가 이만큼 살아낼 거라고 믿는 것이 더 무모해 보였겠지. 저기까지 닿아서, 저기까지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애닳게, 어떤 험한 것을 보려고, 나이라는 언덕을 넘어갔느냐, 하고. 그러나 지금은 애가 둘이고, 믿을만한 남편이 있으며, 그토록 내가 고대했던 천재적인 글을 써서 세간을 놀라게 한 적도 없다. 한동안은 읽고 쓰는 일을 완전히 멈춘 채 살았고, 그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그래,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처음 시간을 발견한 사람을 떠올려본 적이 있다. 매 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동일한 얼굴을 알아차린 사람, 아니면 국지성 호우가 같은 시기에는 더 많이, 자주 내린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 그 바람에 강물이 범람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남들이 깨닫지 못한 미묘한 순간을 먼저 바라본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마 처음에는 서로를 통해 시간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연로해지는 등어리와 어머니의 피로한 주름들 사이에서, 매 순간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제와 같지 않은 몸때문에 죽은 아비를 보면서,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또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만큼 생에서 헐거워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보면서. 몸 속에 시간이라는 것이 있어 결국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스러지고 다시 누군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게 아닐까.

시간이, 여전히 내 발 밑으로 흐르고 있다. 아마 나는 이렇게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된 후에 죽을 것이다. 내 몸이 이미 죽음을 품고 있다면, 그 죽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수치심, 슬픔도 이미 내 안에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오늘도 비참한 것 아닌가, 하면서 아침이 오는 것을 보고 있다. 연일 떠들어대는 기후위기에 대한 뉴스를 듣는다. 마트에 가서 값이 오른 오늘의 애호박을 들고, 값이 더 오른 내일의 양파를 들고, 아주, 우리 모두 천천히 죽어가겠구나, 하는 허무를 수만 번 느끼고 나서야, 그제야 세상이 고요하게 끝나려하나.


오늘은 12월 5일이다.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포켓 사이즈 노트 다섯권과 펜 다섯 자루, 그리고 리필심 열 자루를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올해 팔 월에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온 후, 나는 무엇 하나 입어보지 않고, 신어보지 않고 사는 법을 체득하는 중이다. 작은 머플러 하나를 구매하고, 오래된 운동화를 색깔만 바꿔 한 켤레 더 구입했다. 내년에 필요한 물건들을 두둑하게 준비하고나니 이제야, 올 테면 와봐라, 2026년, 하고 두 손을 꼭 쥐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래, 내년에도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남편과 나는 조금 더 나이 들것이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글을 쓸 수 있을 것이고, 외국어를 조금 더 공부할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 가는 것이 너무 서글프지 않을만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시간의 구획 속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 그 열망으로 조용히 타들어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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