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밝게 비추기 위하여

『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웅진지식하우스)

by 단휘

사람을 안다는 것. 그러니까 나를 알고 당신을 알고 우리를 알고 그들을 안다는 것. 그 무엇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생각보다 남은커녕 나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를 알고 남을 알고 우리를 알면 우린 분명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여기서 안다는 건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이름, 좋아하는 것, 취미 등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어떤 사람 그 자체를 안다는 것. 뭐라 규정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를 존재로서 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재로서 알고 대할 때, 우리는 서로를 밝게 비추는 자 — 일루미네이터가 될 수 있다.




「1부 어떻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읽으며, 지나온 날들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사회생활이 통상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지났을 무렵에 나는 유쾌해 보이지만 어딘지 억제돼 있는 듯한 청년이었다. 즉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인 동시에 타인과 쉽게 친해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도 내심은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문장을 마주치는 책의 초반부터 이 책은 분명히 우리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전기 엔지니어 해리 나이퀴스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연구원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좋은 성과를 낸다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엄청나게 뛰어난 존재가 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이트를 준다거나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함께 하고 싶은 존재가 되는 것을 원했다. 사람을 대할 때 어설픈 것 투성이지만 여전히 난 그런 걸 추구하고 있다.


당신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다가간다면, 그 사람은 꼭 풀어야 하고 또 얼마든지 풀릴 수 있는 퍼즐이 아니라 결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임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이다.”라는 내용을 읽으며 익숙함을 느꼈다. 상대를 내가 이해 가능한 형태로 범주화하여 규정하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세상에는 자신이 믿는 ‘본질적인 고정불변의 본성’을 내세우며 상대를 거기에 끼워 맞추고 예외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본질주의자들이 많다. 초면에 MBTI부터 묻고 보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그 범주화된 무언가만을 바라보는 것 같아 난 거부감을 느낀다.


서로를 밝게 비추기 위해, 그러니까 일루미네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누구도 성숙한 채로 태어나지 않는다. 단지 각자가 적합하다고 믿는 방향으로 성장할 뿐이다.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 일루미네이터의 특징을 고루 갖추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일루미네이터가 되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지만, 대부분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드럽고 관대하고 수용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환하게 비추려 애쓴다면, 적어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사소한 잡담과 일상적인 것들을 함께함으로써 당신의 무의식은 상대방의 마음과 함께 움직이며, 두 사람은 서로의 에너지와 기질, 태도에 대해 감을 잡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리듬과 기분에 맞추면서 서로에 대한 미세하고 암묵적인 지식을 얻는다. 이런 지식은 다른 지식이 오가기 전에 쌓아두는 게 좋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걸 새삼 많이 체감하고 있다. 함께 한 작은 일상들이 쌓여 서로를 존재로서 알게 되었을 때, 난 그를 ‘친구’라고 칭한다. 나의 ‘친구’의 기준이 보통의 것보다 더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 다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의 친분이 생긴 걸로 ‘친구’라고 부르지 않고, 충분히 편안한 사이가 되어서야 ‘친구’라고 하더라. (최근에는 동갑이 아니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구시대적 발상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 분을 만나 충격받았다. 나이가 같으면 친밀도와 무관하게 친구고 나이가 다르면 아무리 가까워도 지인이라고 주장하더라.)


저자가 말하는 ‘동행’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많이 닿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와 동행할 때는 의식이 이완된 상태가 된다. 세심하고 민감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상태이며, 상대방을 이끌거나 지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일상을 살아갈 때 당신은 그저 그 사람 곁에서 함께한다.” 특별히 무언가를 함께 하기보다는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 그 속에서 서로를 느끼고 알아가는 것. “선생님은 문제의 정답을 학생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 끝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지 않고 학생이 문제를 푸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때까지 도와주는 것이 동행이다.” 난 역시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저자는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 일어난 일과 관련된 객관적 현실이 있고, 일어난 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거나 어떻게 해석되는지 또 어떤 의미를 띠는지와 관련된 주관적 현실이 있다.” 전자의 현실은 잘 인지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나’라는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관적 현실을 살아간다. “사람은 저마다 현실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현실에 오로지 주관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긴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 같은 것이다.


각자의 주관적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런 차이를 느낄 때 우리는 질문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다. “의견 차이 아래에 놓여 있는 다른 차원의 차이를 찾는다는 것은, 대화의 두 당사자가 그런 의견을 가지게 된 도덕적·철학적 뿌리를 찾는 것이다. 이럴 때 이 두 사람은 서로를 탐구하게 된다.” 자기주장을 반복하며 논쟁을 하기보다 차이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 주제를 넘어서 상대방에 대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부 타인이라는 세계」에서는 살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특히 말랑말랑모임터나 청년이음센터, 청년기지개센터에서 만났던 청년들을 떠올렸다. “사람은 누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느낄 때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외로운 사람의 마음은 의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의도치 않은 곳에서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결국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타인과 맺는 친밀한 접촉을 두려워하게 된다.” 소외되고 고립되면서도 그런 단절을 벗어나는 것 또한 두려워하게 되는.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도 타인을 공격하며 사업 참여 청년들 사이에서도 고립되고 마는 이들을 몇몇 봤다.


이 청년들은 사회적인 기술과 사회성이 전혀 없고, ‘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지?’라는 생각에 시달린다. 한 연구자가 말했듯 그들은 원래부터 외톨이가 아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려 했지만 실패해서 외톨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지른 청년들에 대한 문장이지만,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그 어떤 외톨이가 원래부터 외톨이였을까. 그들은 그렇게 된 것이다. 사회적인 기술과 사회성이 떨어져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니 사회적인 기술과 사회성이 늘지 않는다. 그런 악순환 속에 그것들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문제의 핵심은 그런 사회성 결핍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가 학생의 기업 경로를 성공적으로 열어주는 데 집착하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 구성원을 배출하는 데는 관심을 끊었다.”, “간단히 말해, 나를 포함한 몇 세대에 걸친 사람들은 타인의 깊이와 존엄함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기본적인 도덕적 기술이 사라지면서 단절과 고립이 나타났고 잔인함이 허용되는 문화가 나타났다.” 고립과 차이, 갈등 속에서도 원활한 상호작용을 해내려면 어려운 대화가 필요하다.


어려운 대화란 개인적인 차이 및 권력 불평등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뜻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와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드러내지 않은 채 방어적으로 시작된다.” 갈등을 겪는 상대와의 대화도 어려운 대화에 속한다. 사회성 결핍으로 원활한 상호작용이 안 되는 상대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도, 개인적인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된 다툼도 다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 모두 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원활한 대화가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각자 자신이 설정한 틀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주장하기만 해서는 대화에 진전이 없다. 성숙한 자아를 가진 일루미네이터라면 자기만의 틀에 갇힌 상대를 끄집어내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상대가 설정한 틀에서 대화를 시작하여 조금씩 밖으로 함께 나와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한다. 상대가 설정한 틀 속에서의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고 조금이나마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알고 나서야 우린 유의미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대화’인 것이다. “어려운 대화를 어렵지 않게 할 방법은 없다. 자기와는 인생 경험이 전혀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의 말을 듣는 능력을 높이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 힘쓰면 타인의 관점을 얼마든지 알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불신을 신뢰로 되돌려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어려운 대화는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책에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으며 우울증뿐만 아니라 고립은둔청년에게도 충분히 해당사항 있는 말이라고 느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회복될지 조언하는 것은 당신이 그와 그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아픔을 견디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가 자기 경험을 털어놓을 분위기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조언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이야길 들어주길 바랄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미러링, 정신화, 배려 등의 기술을 통해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 공감은 사회적·감정적 기술의 총합이다. 책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감정 입자도가 낮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감정 상태를 미세하게 구분하는 능력인 감정 입자도에 대한 설명을 보니 나는 감정 입자도가 상당히 낮은 편인 것 같다.


책에선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잘 알려면 그가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상실을 경험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그 경험을 한 뒤에는 자신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 이전과 이후 모두를 알아야 그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외면해 온 시간 속에서 난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녀석이 되었다. “사람은 대개 어느 날 갑자기 센 충격을 받는다. 그 뒤로는 상실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 일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기간이 이어진다. 이때 감정은 꽁꽁 싸매져서 봉인된다. 심리학 표현으로, 이 사람의 내면은 ‘유예’ 상태가 된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되면 이 사람은 과거를 어떻게든 대면해서 처리해야 함을 깨닫는다.” 난 ‘유예’ 상태에 있던 기억은 대체로 아직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심리 모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성격을 개선하는 것은 체육관에서 신체를 단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훈련과 습관을 통해서 정직, 용기, 결단, 겸손 등과 같은 보편적인 미덕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꾸준한 연습과 단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리라.




「3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상호작용을 하는 게 그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를 알고 싶은 척 나에 대해 물어는 보지만 전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가령 일단 MBTI부터 묻고 보는 사람들이라거나.


나는 MBTI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그것이 이분법의 네 제곱이라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는데 그게 뭔지 명확히 모르겠었다. 책에서 마주친 문장은 그 미묘한 거부감의 정체를 조금 깨닫게 한다. “MBTI 검사는 잘못된 이분법에 의존한다. 이 검사는 사람을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두 부류로 나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성적인 사람이 감정에도 능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성격 ‘선호도’ 검사지, 내가 이렇다 하는 걸 보여주는 검사도 아니지만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가 당신을 잘못 바라본다고 느낀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치자. 이때 이 느낌은 그 사람이 당신을 하나의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어떤 범주에 속하는 누군가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난 누군가 나를 잘못 바라본다는 그 느낌 자체가 싫은 것 같다.


저자는 빅 파이브 성격적 특성 검사로 사람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본다. 이 검사는 외향성, 성실성, 신경성, 친화성, 개방성이라는 다섯 가지 주요 성격 특성을 다룬다.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어떤 즐거움, 즉 어떤 긍정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추구하며 몰두할 뿐이다.” 10대 시절의 나는 딱 이런 녀석이었다. 요즘은 즐거움에 대한 자극 추구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립과 은둔 속에서 너무 많은 걸 잃은 것 같다. 성실성은 오히려 조금 늘어난 것 같고, 신경성은 늘 높았지만 아닌 척해왔던 것 같다. 친화성은 높고 싶었지만 잘 안 되더라. 개방성도 학생 땐 높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여간 책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말한다. 심리학자 니컬러스 에플리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화가 얼마나 즐거울지 예측하지 못하기에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대화 욕망을 과소평가하고, 대화를 통해서 자기가 배울 지식과 교훈을 과소평가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깊은 대화로 들어가서 개인적인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 과소평가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그들은 물어본 것 이상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모든 과거의 이야기는 그 이후 시점에 재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되돌아가서 과거를 재해석하며 한결 관대해지고 감사하게 된다.” 좋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조차 나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적어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 시기를 지나가고, 또 인생을 제법 많이 산 뒤에는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다시 그곳을 찾는다.” 나의 어린 시절은 무의식 저편에 존재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나간 날들을 다시 마주하려고 해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마저 대체로 외면하고 회피해 온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기억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면 무의식이 다시 흩어 놓는다. 아무래도 난 지난날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지혜는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인간관계로 구성된 체계 속에서 연마된 사회적 기술이다. 지혜는 사람들이 모여서 파커 파머가 ‘진실의 공동체community of truth’라고 부른 것을 구성할 때 연마된다.”, “진실의 공동체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진정으로 함께 바라보고 탐구하고자 할 때 만들어진다.” 그런 지혜를 갖춰 나갈 때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일루미네이터에 한 발 가까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