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뚱, the 길냥

by 단이

누구는 망고, 누구는 호랭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 집은 노뚱이라 불렀다. 노란뚱땡이. 노뚱이는 노란 몸에 연한 주황색 줄무늬가 있는 길에서 사는 고양이였다. 귀엽고 상큼한 망고라고 하기에 노뚱이는 덩치가 너무 크다고 엄마는 말했다. 노뚱이에게 호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또한 어느 고양이보다 큰 살집 때문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낮은 주택 사이의 틈과 시멘트 담벼락을 방패 삼아 살아가는 길냥이 치고 노뚱이는 과중했다. 3살 아이만 한 체구로 능숙히 담장을 넘나드는 노뚱이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범이 내려온다고 했다.


노뚱이는 우리 골목의 대장냥이였다. 노뚱이 무리에는 똘마니냥이가 몇 마리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과 주황색 점이 박힌 암컷 삼색냥이와 회색에 짙은 줄무늬가 있는 고등어냥이가 노뚱이의 절친들이었다. 대장 노뚱이는 우리 골목 지키기에 열심이었다. 새로운 고양이가 얼씬거리면 길 한가운데 무겁게 앉아 노려보았다. 노뚱이에게 영역 다툼을 맡긴 삼색이와 고등이는 피곤한 듯 하품이나 하며 그 뒤 몇 발짝 떨어져 누워있기 마련이었다.


노뚱이는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주는 사료뿐 아니라 사랑도 독차지하려고 했다. 어흥 할 것 같은 노뚱이는 가냘프게 야옹 하며 꼬리를 세우고 다가와 우리의 다리 사이로 몸을 비비고 지나가곤 했다. 사람들은 그런 노뚱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누구는 금방 달려가서 츄르를 사 오기도 했다. 나는 한술 더 떠 다이소에서 고양이 장난감까지 사와 재롱도 떨었다.


노뚱이는 사람을 이용하는 영리한 길냥이였다. 인간에게 친한 척하면 맛있는 게 나온다는 걸 학습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삼색이는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노뚱이가 간식을 받으면 살며시 다가와 따라먹고는 금방 도망가기 일쑤였다. 장난감을 가지고 나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리를 뻗기만 할 뿐, 노뚱이와 달리 곁을 절대 주지 않았다.


하굣길 어린 학생들은 소란스레 골목골목을 해치며 고양이를 찾아다녔고, 담장 사이 햇볕이 들어오는 바닥에 늘어져 낮잠을 자던 노뚱이 무리는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담벼락이나 담벼락과 연결되는 판잣집 옥상으로 단숨에 올라가곤 했다.


아래 골목 단칸방에 사는 90이 훌쩍 넘은 할머니는 적적함을 털어내듯 골목에 나와 포장마차에서나 볼 법한 조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는 노뚱이와 삼색이를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기도 했다.


길냥이에게 깨끗한 식수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나는 우리 집 길목에 물통을 마련했고, 노뚱이와 친구들은 물을 마시러 왔다가 그곳에 아예 누워 쉬어 가곤 했다. 쉬고 있는 길냥이 무리에게 인사를 하러 가면 노뚱이는 어김없이 나를 반기며 다리에 머리를 비볐고, 나는 그 포근해서 금방 녹을 것만 같은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모두가 노뚱이에게 친절한 건 아니었다. 장마철 지붕이 있는 우리 집 주차장에 몸을 피하고 있던 노뚱이 무리는 어떤 행인이 장난으로 휘두른 우산에 맞기도 했다. 그 모습을 우연히 감시카메라를 통해 목격한 나는 화가 나서 경찰서에 신고한다며 난리를 쳤지만, 주차장에 “길냥이도 소중한 생명입니다. 학대 시 최대 징역 2년에 처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크게 프린트해 붙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 뒤로 노뚱이와 삼색이는 긴 막대기 모양의 장난감만 들고나가도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거리의 대장 노뚱이는 한번 종적을 감춘 적이 있었다. 일주, 이주, 삼 주가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노뚱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집에서는 스티로폼으로 된 구멍이 뚫린 박스를 내다 버렸다. 노뚱이에게도 추위를 피할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쓰레기 더미에 호기심이 생겼고, 때마침 그 집에서 나오는 이웃의 어르신과 말을 트게 되었다. 어르신은 이제 그 집에 살 고양이가 없어졌다고 했다. 노뚱이, 호랭이, 망고, 아니, 그 큰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했다.


노뚱이는 정말 죽었을까. 어떤 뽀글 머리 아주머니는 몇 주 전 함께 다니던 친구 고양이가 죽을 것처럼 길 한복판에 누워있었고, 그 옆을 노뚱이가 지켰다고 했다. 그러면 노뚱이가 죽은 게 아니라 삼색이가 죽었고, 노뚱이는 자취를 감추고 슬퍼하고 있는 걸까. 말을 걸고 거취를 알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길냥이들의 생사는 이웃들의 증언과 추측으로 완성되었다.


우리 골목의 자랑거리가 사라진 데 아쉬움이 아련함으로 바뀔 때쯤 노뚱이와 삼색이는 기적처럼 다시 나타났다. 따뜻한 봄바람이 더운 열기로 바뀔 때였다. 노뚱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우리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비볐다.


그해 여름, 나는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더위에 지치진 않을까 길냥이 물통에 물을 채워주고 나서야 저녁밥을 먹었다. 그러나 노뚱이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도관이 동파한다던 그 몇 주를 뒤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노뚱이는 숨소리가 좋지 않았다. 비만이어서 그런 걸까, 쉭쉭 대던 숨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나는 유튜브를 검색하며 고양이 병환에 대해 알아보긴 했지만 노뚱이를 병원에 데려갈 만큼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단짝 삼색이가 혼자 그림자처럼 돌아다니는 걸 보고 노뚱이가 죽은 것을 실감했다. 노뚱이가 사라지고 삼색이도 잘 보이지 않자, 고등이도 슬며시 눈과 기억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노뚱이의 사진을 본다. 언젠가 우리 집 모퉁이에 배를 깔고 누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동안에도 노뚱이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엄마는 사진에 찍힌 노뚱이의 얼굴에 보통 길냥이에게서 볼 수 없는 위엄이 있다고 했다. 노뚱이는 그런, 위엄 있는 우리 골목의 대장냥이었다. 윗집의 누가 이사를 가고 아랫집의 누가 죽었는지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 골목 사람들은 모두 노뚱이의 생사를 궁금해했다.


아래 골목 할머니가 앉아 있던 의자가 작년 봄부터 비어 있고, 그렇게 거리에는 노뚱이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노뚱이와 같은 길냥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노뚱이는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나봐야 하는 그런 길냥이였다. 그때 사실 나는 푸근한 노란 등의 노뚱이가 아닌 내 마음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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