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 크래프팅이 필요한 순간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하는 이유 (잡 크래프팅이 필요한 순간)
국가인권위원회의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새로운 유해·위험 요인에 대응한 노동인권 증진 방안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용 로봇과 함께 근무하는 노동자의 약 90%가 고용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술은 분명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일의 안정성은 빠르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히 AI로 인해 산업과 직무가 빠르게 재편되는 지금, 안정성이라는 기준은 더 이상 오래 유지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실리콘밸리 투자자 Bill Gurley는 커리어에 대해 인상적인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쓰지 않으면 잃는다(Use it or lose it)'는 관점입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본 뒤, 사람들이 결국 후회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았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와튼스쿨과 함께한 조사에서도 직장인의 약 60%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도 비슷한 통찰을 담은 기준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처음 접하면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들이 말하고 있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조건과 안정성이 아니라, 의미와 필요를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좋은 길이 아니라, 내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여기서 많은 분들이 멈추게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정작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Job Crafting(잡 크래프팅)입니다.
잡 크래프팅은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업무를 바라보는 방식,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일을 해석하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같은 일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단지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성장과 연결 지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우리는 왜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본의 경영자 이나모리 가즈오는 일을 마음을 갈고닦는 수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키고 인격을 단련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우리는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낍니다. 반대로 아무리 높은 연봉을 받더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라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커리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 것보다, 내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리해보면 지금 시대에는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 직업이 안전한지보다, 이 일을 계속해도 내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만 발견됩니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선택이 시간이 지나면 리스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커리어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은 어쩌면 안전하게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 일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나요?
[출처]
- 국가인권위원회,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새로운 유해·위험 요인에 대응한 노동인권 증진 방안 실태조사' 보고서
- Connie Loizos, Bill Gurley says that right now, the worst thing you can do for your career is play it safe, TechCrunch, 2026.02.22
- Bill Gurley, Runnin’ Down a Dream - Thrive in a Career You Love, Interview by David Epstein, Johns Hopkins Carey Business School event, 2025.12.16
- 전영창(전성은), 거창고등학교 교장, 직업선택 10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