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커피 6

나의 일용할 양식

by 오늘의 커피

매일 읽는 책이 있다.

눈을 뜨면 커피를 내리고 한껏 조도를 낮춘 서재에 틀어박힌다. 보통은 해보다 먼저 일어난다. 새벽의 고요가 있다. 그 고요의 맛을 알게 된 후, 나의 기상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대단한 자기 계발을 위해서도, 유행 같은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새벽이 좋아서다.


<매일미사>, <인간의 길>, <인생독본>

요즘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는 책이다.

매일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깊이와 깨달음이 있다. 대학교 2학년, 파스칼의 <팡세>를 접하고 난 회심을 했다. 그 이후, 난 늘 돌아갈 곳이 있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는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의 회심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시점만큼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화창한 아침, 윕스네이드로 가는 중이었다. 출발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길에 생각에 잠겼던 것도 아니었다. 격정에 휘말려 있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감정"이라는 말을 절대 쓰지 말아야 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그 경험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여전히 침대에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도 자기가 깨어났다는 사실만큼은 인식하고 있는 것과 아주 흡사했다. 그리고 이층 버스에서 경험한 순간처럼 애매했다." (<예기치 못한 기쁨>, 339쪽)


크리스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앙을 버리고 완고한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1929년 회심한 순간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대단히 "맥 빠지는 회심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이층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어떤 놀라운 계시가 내린 것도, 격정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마음상태였다.

내면의 깊은 물음, 올바른 방향을 찾고자 한 원의가 그를 인도했음이 분명하다. 마음에 물음을 갖고 있는 자는 언젠가 답을 찾게 되어 있다. 물음에 대한 답은 사방에 있다. 다만 가리워진 눈이 보지 못할 뿐이다. 그 가림막을 걷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나 자신을 알기보다 남을 알고 싶어 하고, 그런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인터넷 세상이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고 있다. AI의 위협이란 것이 과연 악의적인 테크 기업의 욕망에서만 비롯됐을까? 이전에 우리가 이미 고유성을 내주었는지 모른다. 인터넷 세상에 빠져 생각하는 능력을 잊어가는 사이 인간의 고유한 '사고'를 대신해주는 세상이 가까워지고 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하고, 편리함의 유혹에 빠진 우리가 자초한 위협이다. 우리는 산만해졌고 그 산만함을 돈으로 바꾼 기업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너무 깊숙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편리함으로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갈대일 때뿐이다. 파스칼은 말했다. «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 mais c’est un roseau pensant.» "인간은 갈대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 하지만, 그건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갈대에 비유함으로써 연약함을 극대화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반전이 있다. '생각하는' 능력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말한다. «Travaillons donc à bien penser.» "잘 생각하도록 애씁시다"


내가 가진 밑천인 '생각하는' 능력이 바닥나기 전에 핸드폰을 저 멀리 숨겨둔다.



사진: Unsplash의 Lizzie O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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