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커피 4

K-사람

by 오늘의 커피

"저기 저.. 저.."

"자리 났네."

앞자리에 줄지어 앉은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손짓 눈짓 말을 했다. 방금 전 전철 문이 열리며 우르르 몰려들어와 멀뚱히 선 내 앞의 여러 자리를 차지하신 바로 그분들이었다.

"네..."

난 뾰족구두를 신고도 자리 같은 건 탐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예의 바른 답을 한 후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그때 나보다 자리가 간절했던 누군가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아이고!"

할머니들은 나의 작은 손해에 순도 백프로로 안타까워하셨다.


수술 전날은 심란하다.

위험하지 않은 수술로 괜한 감상에 빠지는 일 따윈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수술 전날 혼자 있기를 청했다. 난 부랴부랴 잡은 다인실의 맨 끝 베드를 차지했다. 대학병원은 지방에서 명의를 찾아온 이들의 집합처였다. 전국 팔도의 환자들이 모인 곳에서 침대 사방을 두른 커튼 너머로 사람들의 얘기가 넘어왔다. 반나절도 안돼 환자들의 병명이며 가족관계, 심지어 그 사이가 좋은지까지 얼굴만 모를 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적인 소란을 성가시고 촌스럽게 느끼며 벽 쪽으로 등을 돌렸다. 전혀 만날 일 없던, 앞으로도 없을 병실 동기들과 며칠밤을 보낼 생각에 아득해하며.

수술 당일 새벽.

앳된 얼굴의 레지던트가 나를 깨웠다. 몇 가지 체크를 한 후 준비를 일러주었다.

"이 고무줄로 머리카락이 나오지 않도록 잘 묶어주세요."

크록스를 신은 의사는 내 손에 노란 고무줄을 몇 개 건네고 답을 들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짧은 단발의 이곳저곳을 묶기 시작했다. 야무지지 못한 손은 삐져나오는 머리카락 때문에 허공에서 한참 헤매야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따뜻하고 주름진 손이 내 불복종의 머리카락들을 단단히 잡아매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가벼."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동안 난 괜히 울컥했다.


대학시절 프랑스인 교수님이 계셨다.

지금처럼 잘 나가는 나라가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인이 우리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다른 좋은 곳이 많을 텐데 젊은 나이에 여기 오신 이유가 뭘까 우린 늘 궁금했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를 얻어 그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에 어떻게 오셨어요?"

"일본에 자리가 없어서 임시로 왔다 계속 있게 됐어요. 이젠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이 없어요."

"왜요? 우리나라 어디가 좋으세요?"

"사람. 한국사람이 참 좋아요."

스무 살의 우리는 다른 답을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연, 파란 하늘, 온화한 기후. 교과서가 알려준 자부심의 내용을 떠올렸던 우리는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사람이 좋다고?"


파리에서, 런던에서 한국이 그리웠다.

우중충한 파리의 하늘, 그 보다 더한 런던의 하늘 아래서 난 늘 허기에 시달렸다.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도 달랠 수 없었다. 어느 날... 깨달았다. 한국사람이 좋다던 교수님의 말씀을. 난 정 많은 한국사람이 그리웠던 거다. 할머니들의 촌스러운 관심이, 옆 환자의 손이 되어주는 간섭이 고마웠던 거다.

이젠 전철에서 고개 들고 멀뚱히 주변 살피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방문객으로 시끌벅적하기까지 하던 병실은 다 옛날 얘기다. 지하철에서도 끊김 없는 인터넷은 사람들의 시선을 손바닥으로 끌어내렸고, 코로나 이후 병실은 감염위험의 이유로 고요하다.


세계인이 알아보기 시작한 K-음악, K-영화, K-음식의 근원은 '감수성 풍부한 한국사람'이다. 정작 우리 자신은 괄시하는 눈물바람의 다감한 우리다. 차마 남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평화의 민족이 된 이유다. 한 번도 남의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 없는 '평화의 민족'이라는 타이틀이 못마땅한 적이 있었다. 세계에서 잘 나가는 나라들은 모두 남의 땅 뺏기를 주저하지 않았던데, 3.1 운동도 무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만약'들을 열거하며 선조들의 순진한 평화를 아쉬워한 어리석은 시절이 있다.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힘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이제 안다. 그 평화의 근원인 사람 사이의 정을 대수롭지 않게, 또 어떤 때는 못 견뎌했던 내가 부끄럽다.

선한 마음이 흉흉한 뉴스들로 움츠려드는 요즘이다. 물론, 맞서야 할 악, 뿌리 뽑아야 할 가라지들이 있다. 뽑아야 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그 권한이 내게 없다는 것도, 다만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안다. 어쩌면 알곡일 때도 가라지일 때도 있는 게 사람이란 것 까지도.

힘을 내보려 나의 공기가 되어주는 착하고 다감한... 아주 평범한 이웃들을 불러본다.


[...] 너는 오늘 아침 무엇에 놀라서 우는구나

분명코 무슨 거짓되고 쓸데없는 것에 놀라서

그것이 네 맑고 참된 마음에 분해서 우는구나 [...] - 백석, <촌에서 온 아이>




(사진: Unsplash의 Ryoji Iw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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