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톰 크루즈가 필요한 이유
"I am Tom."
이렇게 영어교과서가 시작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배우는 남의 나라 말 첫 문장이었다.
모국어라면 엄마, 아빠가 먼저였겠지만 영어의 첫마디는 '톰'이었다. 그러니 톰은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명사였다. 영어가 미국말인 줄로만 알던 시절 상상 속의 톰은 우리의 실력과 함께 자랐다. 그러던 톰을 마침내 만났다.
<탑 건>
개봉 영화가 몇 안 되던 시절, 계절 내내 같은 영화가 개봉관에 걸렸다. 먼저 보고 온 아이들의 얘기는 잘생긴 톰이 줄거리였다. 스토리를 잊게 할 만큼 스크린 가득 채운 톰의 얼굴은 상상 속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맞아, 이런 게 미국이지."
"역시 미국사람이 잘 생겼네."
비행기를 타는 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보는 것도 요원하던 시절, 미국사람은 다 톰과 같을 게 분명했다.
88 서울올림픽이 가져온 건 메달만이 아니었다.
'여행자유화'
남산아래에서 반공교육과 해외여행객으로서의 에티켓 교육까지 마치고 나면 비로소 비행기를 탈 수 있다. 그때까지 제주도도 가본 적 없던 나는 덜컥 미국으로 여름방학을 보내러 가게 됐다. 내가 아는 미국에 맞춰 백화점에서 산 옷으로 멋을 한껏 부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밟은 미국땅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카펫이 깔린 공항은 조용하고 상쾌한 냄새가 났다. 아... 가볍고 밝은 공기란... 높고 파란 하늘 아래 태양은 우리나라에서 보던 태양이 아니었다. 미국하늘, 미국공기. 습기 가득하고 후덥지근한 여름이 아닌 캘리포니아의 산뜻하고 뽀송뽀송한 대기에 우리나라를 완전히 잊었다. 어학연수를 하기로 한 버클리대학은 또 얼마나 크고 최신식이던지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모든 게 상상이상으로 좋았고 멋졌다. 한 가지 빠진 게 있었다.
'톰'.
톰이 없었다. 내 덩치의 두 배쯤 되는 사람들은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사람들만 사는 건 아니리라 예상했지만 맞닥뜨린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포기는 빨랐고 그가 아니라도 미국은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경험은 상상을 기죽인다.
한 번 떠난 해외여행으로도 상상을 수정하고 하향조정할 수 있었다. 지각 있는 대학생이라면 으레 품어야 하는 반미주의 또한 한 몫했다. 나이키를 신으면서도 반미를 외쳐야 했다. 그렇게 미국을 미워해야 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역사적인 맥락이나 제대로 고민한 적 없던 나는 휩쓸려 따라가는 쪽을 택했다. 그때 다시 톰이 나타났다. <미션 임파서블>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액션 히어로의 등장은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들어맞았다. 열차 위 숨 막히는 액션에 숨죽이며 다시 톰을 응원하게 됐다. 제국주의자라 목소리 높이던 이들도 어둠에 몸을 묻고 스크린 속 불가능한 미션의 성공을 남몰래 빌었다.
변할 것 같지 않던 굳건한 세계관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처럼 허무하게 무너졌다. 반미를 외치던 주먹 쥐 손들은 가로막힌 조직세계로의 입문대신 자본시장을 택했다. 숭상하던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돈'을 두자 방향을 바꾼 열심이 그들에게 화려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 누구도 정신의 우위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속도는 빨랐다.
지기 싫어하고 재주 많은 이들로 가득한 나라는 잠도 없어서 앞선 나라들을 따라가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더, 더 가속도가 붙었다. 그 사이 빌보드도 헐리우드도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변화를 놀라워하는 건 촌스런 일이다. 이제 세계가 우리의 무대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인천공항에 익숙한 눈에 비친 공항은 작고 낡았다. 오르락내리락 언덕의 작은 기차도, 버클리까지 가는 지하철 바트도, 심지어 감탄을 자아내던 피자집도 한물간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버클리대학의 소박함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어가야 했던 강의실 건물이, 당시 새로지었던 기숙사 건물이 허름하기까지 했다. 다 큰 어른이 어릴 적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에 난 한동안 어쩔 줄 몰랐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변한 건 그쪽이 아니라 나란 걸 알았지만 첫사랑의 추레한 변화에 느끼는 안타까움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란 우리가 아는 부잣집의 대명사였다. 철들어 알고 보니 마약에 찌들고 총기사고가 다반사인 위험천만의 속사정이 있는 집이란 걸 알고 '아차'하는지 모른다. 흉내내고 따라잡느라 '나'를 잃어버려 허전한지도 모른다. 화려한 겉모습에 반해 내 것을 갖다 버리고 정작 들여놓고 보니 별 것 아니라 아쉬워하는지도 모른다.
<미션 임파서블 7>이 개봉했다.
그 사이 톰은 '톰 아저씨'가 되었다.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더 많이 변했다. 다행인 건 스크린 속 톰은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영화시작음에 맞춰 아찔하게 등장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하는 동안 세월은 흘렀고 미국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우린 컸다. 이제 할리우드 스타도 옆집 아저씨처럼 만만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덩치만 커버린 아이처럼 우리의 속마음은 여전히 동경해야 할 무언가가 필요한지 모른다. 옆 동네에 나타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톰 아저씨가 되어준 톰 크루즈가 우리에겐 여전히 필요할지 모른다. 과거 세상을 위협하던 거대 악들이 산산 조각나 개인에게 씨 뿌려진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스크린 밖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지 모른다.
반미를 외치는 것도 친미를 외치는 것도 다 어리석은 일이다. 옆집도 좋을 때가 있고 싫을 때가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나라 사이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속내가 무엇이었든 우리가 어려울 때 먹을 것도 주고 아픈 데도 고쳐준 선한 사마리아인이던 시절의 미국이다. 톰의 나라가 영웅흉내라도 내는 다시 좋은 이웃이 되길 응원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나만의 순진한 바람일지라도.
(사진: Pixabay의 David 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