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 - 5장 리포트 중 발췌]
천천히 돌아가는 턴테이블이 있는 화면 옆, 레코드의 질감을 살려 만든 커다란 검은 파라솔이 있다. 한 여성은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화면을 본 후 파라솔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작가 장유정의 ‘손길이 필요한 일’은 레코드와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물리적인 경험을 시각, 청각, 촉각이 동원되는 감각적인 경험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은 현재 문화역서울 284에서 개최되고 있는 ‘레코드284-문화를 재생하다’라는 기획전시에 설치된 것으로, 해당 전시는 “추억의 레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로 제작에서부터 유통과 소비를 넘어 문화 창작까지 이어지는 레코드의 역사와 현재를 훑는다. 없어질 것 같았던 레코드가 디지털 스트리밍 시대에 부활하며 음악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영감의 매개체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며 대면 전시 공간과 박물관을 방문하여 전시를 감상해보았다. 직접 체험하고 관찰해본바 개인적으로 확인하게 된 사실은, 동시대 대중문화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바로 ‘과거’라는 것이다.
비단 레코드의 유행에서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 비평 웹진 사이트인 피치포크가 90년대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대해서 “이 시대는 신기하리만치 느릿하게 전진한다.”라고 한 말을 현재의 대중음악 산업 전반에 적용해볼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라지 록과 같은 다양한 하위 장르와 미세한 경향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소비와 배급의 방식에서 일어났다. 많은 양의 자료를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술력이 향상되면서 샘플링과 같은 수집 관련 기법의 사용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뿌리 깊은 전통을 상기시킨다는 호평도 받는 한편 아티스트를 선구자나 혁신가가 아니라 일종의 큐레이터 또는 아카이브 관리자로 전락시키고 결국 현재 자체의 독자성과 감수성을 좀먹는다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과거로의 움직임은 음악 산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거 의존적인 경향은 문화와 소비 전반에 퍼진 의식에 속한다. 문화계 전반에 중심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레트로(retro)’는 접두사 ‘재-‘(re-)로 시작하는 “retrospective”의 줄인 말이다.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을 뜻하는 레트로에서 한발 더 나아간 ‘뉴트로(newtro)’도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기반을 둔 감성에 현대적인 기술을 접목하여 재현보다 재해석에 중점을 둔 경향을 뜻한다. 실제로 네이버 데이터랩 쇼핑 인사이트에서 최근 1년 동안 ‘디지털/가전’ 카테고리에서 ‘레트로, 뉴트로’를 가장 많이 검색하는 계층으로는 30대가 가장 많았고, 레트로의 모태가 되는 필름 카메라, 8비트 게임기 등을 경험해본 적이 적은 10, 20대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참고로 필자는 '뉴트로'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뉴트로 외에도 언택트, 디지택트 등 2020년을 지배한 뭐 같지도 않은 신조어의 부흥에 가장 이바지한 것 같은 김난도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을 숭배한 르네상스 시대처럼 과거에도 그 이전 시대의 문화를 신봉하는 움직임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과 달리 동시대 유행하는 레트로가 구별되는 특이한 지점은 비교적 가까운 한 세기 이내의 과거를 소환하여, 이미 한 차례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소비한 이미지와 문화에 다시 매혹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레트로 운동에 참여하는 인구의 일부는 레트로가 뿌리를 두는 원본의 시대와 운동에도 참여한 전적이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특이점은 현대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 변화와 소비자로서의 자아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소비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필요에 따른 자연적인 욕구에서 이미지로 대표되는 상징적 가치에 대한 인위적이고 어찌 보면 불필요한 욕망으로 바뀌었다. 언급했듯이 다양한 상품으로 물질적으로 실현되는 레트로 감성은 물질적인 소비의 대상이 되어 그의 유행과 유통이 무한 확산할 가능성을 지닌다. 따라서 레트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 지배적인 문화 생산 양식이 될 잠재력을 지닌 현상이고 앞으로 우리 사회와 문화의 보이지 않는 곳곳에도 침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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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 미학의 주된 주제이자 임무는 이미지와 개념의 관계와 그 간극에 대한 고찰이었다. 18세기 미학적 체제의 등장에서 칸트가 아름다움을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로 정의하며 이미지와 개념의 조화를 말했다면 그 이후의 미학은 양자 사이의 불합치와 파열에 집중했다. 마그리트는 이질적이고 서로 충돌하는 두 대상의 병치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불일치를 확인시키며 이미지와 개념이 맺는 관계의 불일치와 불확실성에 집중했다. 푸코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 진공상태가 우리가 본래 느끼던 안정성을 위협하며 그 관계의 유효성에 의문을 던졌다. 그를 포함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문화와 예술을 포함한 모든 현상을 기호로 이해하고자 했으며 이미지와 개념, 즉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의 일치 불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에 의하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오히려 기호의 본질이고 우리의 관념, 즉 개념은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을 확률이 높다.
보드리야르는 더욱 극단적으로 이러한 틈이 불확실성에서 더 나아가 무관계성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했다.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는 실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칸트의 표현은 양자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시 대상인 원본이 없는 기표인 이미지가 난무하고 우리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현대 예술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어떤 개념과 작위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과 소비 제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예술을 포르노그래피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써 예술의 무의미함과 이중성을 설명한다. 포르노그래피는 성의 은밀함과 모호함이 모두 지워버리고 투명한 성만 남겨 트랜스섹슈얼(transsexuel)하게 된다. 예술 역시 대상과 재현을 맘껏 해체하여 모든 사물을 진부하게 만들고 환상의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트랜스에스테틱(transaesthetique)하게 되었다. 예술은 대상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감춰졌던 것을 고갈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대상이 될 은폐된 무언가마저 사라진 현실에 다다랐다. 완전히 투명한 현실에서 예술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지기 때문에 그 내재적 가치는 사라지게 되고, 이에 따라 현대 미술은 하나의 거대한 공모가 된다.
현대 미술은 무의미가 예술의 이차적인 차원에서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승화된다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서 또 다른 차원의 무의미를 씌울 뿐이다. 이미 무의미한데 무의미해지려는 것이 현대 미술의 핵심이자 이중성이 된다. (...) 현대 미술에 대한 비판은 현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으로 확장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실재가 그것의 기호인 시뮬라크르(simulacre)로 대체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세계로 정립했다. 서양 철학에서 시뮬라크르에 대한 논의는 플라톤 때부터 이루어져 왔지만, 보드리야르는 용어를 처음으로 정립하고 체계화시켰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모든 인공물을 가리킨다. 원본에 대한 모방으로 발생하여 원본과의 연결성이 파괴되면 원본과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원본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니고, 이는 또 다른 원본에 대한 모방으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시뮬라크르, 즉 흉내 낼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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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현실에서 공모로 전락한 현대 예술의 미래에 대해서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전자는 그 공모에 계속 임하기로 선택하는 것으로 예술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부정하거나 그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무상함을 받아들이고 현재 존재하는 예술을 파괴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지금까지 이어졌던 예술적 전통과 규칙을 완전히 파기하고 뒤샹처럼 예술을 새로운 공간으로 보내는 행동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던 공간이나 보내질 공간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고 능동적 니힐리즘에 근접한 자세로 예술의 무가치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미지 간의 위계나 이미지가 나타내는 개념 간의 위계를 주장하는 기존의 공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미지는 어떠한 의미와 가치도 갖고 있지 않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현대 사회가 현실이 기호의 장막으로 사라져 버리는 시뮬라시옹의 세계로 완전히 변모하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평범함이나 무가치는 일종의 타락으로 간주하였으며 모더니즘은 이러한 평범함에서 벗어나 고상함과 같은 가치를 독점하고자 한 것과 같이 수많은 사조와 움직임은 무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능동적인 자세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레트로가 만들어내는 문화의 지형을 비판할 수 있다. 레트로에서 나타나는 과거의 재현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구성과 변형, 그리고 심리 투영을 첨가하여 유희의 지각과 정서를 끌어내고 있다. 대중문화 속의 사례를 찾아보자면 요 몇 년 사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시티 팝(city pop)’이라는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시티 팝이란 일본에서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경제 성장 시기의 일본에서 유행한 음악 사조로 당시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듯이 낭만적이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일본 사회는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권의 영향을 받으면서 문화 수준 또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디스코, 펑크, 재즈 등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최신 유행 장르들의 요소를 수용하고 그 장르적 문법을 기반으로 외국에서 수입한 전기 악기를 적극적으로 빌리며 만들어지기 시작한 디지털 음악이 시티 팝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거의 30년 만에 시티 팝이 다시 유행하면서 특정 가수들은 ‘재-’의 움직임에 편승했다. 김현철은 그 열풍에 힘입어 ‘한국의 대표 시티 팝’으로 지목되었던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오랜만에’를 31년 만에 재발매했고, 걸그룹 ‘원더걸스’ 출신 가수 유빈은 솔로 데뷔 앨범에서 시티 팝을 표방한 ‘숙녀’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 이전에 유행했던 음악 장르와 함께 따라오는 부차적인 패션이나 시각적인 스타일을 하나의 ‘텍스트’로 칭할 수도 있겠는데, 앞서 설명한 시티 팝 유행은 과거의 텍스트를 전적으로 반영하며 거기에서 파생된 아이디어와 변종을 통해 존재한다. 과거의 스타일과 취향을 전면화하여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자극하는 ‘차이’의 느낌을 생산하는 과거의 개성적인 “인용문들”을 거의 그대로 게재하는 전반적인 레트로 문화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단지 기호들의 직조물일 뿐이고 무한히 이어지는 모방 자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시가 앤디 워홀이 수십 개의 통조림 캔을 전시해놓은 것과 절대 똑같다고 할 수 없다. 워홀은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나 기성품의 공허한 기표성을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무가치를 지향했지만, 레트로 문화는 모방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기의를 찾아 또 다른 개념과 연결되고자 하고 그 개념은 바로 원본이 탄생한 ‘과거’라는 모호하면서도 방대한 시간적인 개념 그 자체가 된다.
첫 단락에서 언급한 레코드 열풍은 과거에 발매되었거나 유행했던 음악을 다시 듣고자 하는 움직임보다 레코드라는 사물과 얽혀있는 과거에 대한 추억 또는 향수가 큰 구매 동기로 작용하며 새로운 소비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대중가요와 언더그라운드 장르에서 새로운 음반을 레코드 형식으로 출시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유행하는 레코드 문화는 과거에 발매된 레코드를 수집하고 과거의 음악을 당시에 녹음되었던 환경이나 음질을 중점으로 두는 것보다 현재의 음악을 과거의 양식으로 소비함으로써 레코드판의 바늘 긁히는 소리와 같은 잡음을 인위적으로 첨가하면서 오히려 날것의 매력을 중심으로 한다. 즉 과거에는 음악을 발매하고 듣는 양식으로 존재했던 것이 기존에 관계를 맺었던 개념과 분리되어 오늘날에는 역사성과 연결되며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는 시뮬라시옹, 즉 ‘시뮬라크르 하기’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가의 원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어떤 실재가 존재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뮬라크르는 이러한 등가 원칙을 무시한 채 기호의 지시 기능을 없앨 수 있으며 이미지는 실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마치 레코드에 녹음된 음악보다 레코드라는 사물과 레코드로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에 부여되는 과거와 옛날의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연상되는 것과 같다.
과거의 이미지로 이처럼 실재를 이미 모방한 시뮬라크르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새로운 개념과 가치를 다시 부여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상징성을 지니는지 또는 미래를 나아가기 위해 어떤 환경을 마련하는지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혁신적이고 새로운 이미지 대신 오래되고 안정적인 것의 형식을 택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고, 발전된 디지털 기술의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형식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형식이 출현할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결론은 레트로라는 경향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동력이라기보다는 퇴보에 해당하고 우리 사회와 문화의 전위대(avant-garde)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결코 가질 수 없다. 물론 벤야민은 대중문화로부터 버림받은 대상은 그 안에 역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상들 안에서 정서의 영향을 받는 예술적 실천과 삶이 존재한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매체가 메시지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유명한 테제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 매체 자체 혹은 이미지의 환상만 생산할 뿐이라는 비판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레트로가 이미 주요한 상업적 및 소비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는 면에서 레트로가 상징하는 과거에 대한 향수는 저항 또는 생산의 힘을 발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음악에서 나타나는 레트로의 사례만을 주로 살펴보았으나 과거에 대한 향수는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평론가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21세기 초는 포스트모던의 인용 부호를 넘어설 정도로 폐허에 매혹된 상태인 기이한 폐허 애호증을 나타낸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각종 전시 공간과 미술관에서 16mm 필름 장치에 구현된 필름의 전시가 증가하는 최근의 사건을 설명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폐허’에 대한 애호증은 급격히 발전하는 현대 기술과 디지털화를 둘러싼 불안과 연관되어 있고 새로운 것이 매일 생산되는 현재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오히려 오래되고 낡은 것에 매혹되는 상황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몇몇 이들은 레트로는 현대 사회와 미학의 ‘매끄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고 레트로부터 현재와 예상 가능한 미래에 대항할 어떤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트로라는 현상을 단순히 노스탤지어적 퇴행으로 결론짓는 것은 문화의 다층성을 배제하는 결론일 수도 있다. 문화는 사회의 여러 집단과 축이 만나는 교차로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특정 주체마다 주어진 문화 현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므로 이 현상을 단일한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티 팝 같은 신자유주의 전성기의 음악과 콘크리트 공사장의 카페 디자인, 고장이 난 듯한 뻑뻑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금의 현상에서 현재에 대항하며 다른, 혹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검증된 고전을 각색하거나 지배적 지위 또는 컬트 상태에 오른 원류를 다시 사용하는 일은 최소한의 관객과 관심을 보장하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연결 관계에 처한 창작자의 측면에서 과거를 거부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에서 비롯된 사물과 이미지를 또다시 과거라는 기의와 연결하는 경향이 문화 시장 내 시공간의 간극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느끼고 감각하며 사유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과 함의를 지니는지 더더욱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