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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케맨 Oct 05. 2019

#9 무지개

하루 한 컷

제주도 정방폭포


전날 밤 에어비앤비 주인아저씨께서 아침 일찍 가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늦잠 전문인 우리가 웬일인지 일찍도 일어났다. 짐을 싸 두고 아침 일찍 산책을 다녀왔다. 정방폭포도 폭포지만 숙소에서 가는 길에 지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걸어갔던 그 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딘가 이국적인 나무들과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인 탓도 있었지만,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던 산책길은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이게 했다. 돌로 만든 징검다리는 가는 길과 상관없는데도 괜히 한 번 건너보게 했다.


제주도 관광지 특유의 거대한 주차장이 보이면 제대로 찾아왔구나 안심이 된다.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던 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니, 조금씩 공기에 수분기가 묻어난다. 얼굴에 물이 튀는 것 같다. 진짜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을 때,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보였다. 이날 무시무시한 태풍이 오고 있었는데, 내일 무사히 부산에 갈 수 있을까 하던 걱정도 잠시 잊고는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에 속아 잠시 안심했었다.


주인아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감동받았다.


뚜벅이들이 제주도에서 다음 목적지로 가려면 버스 시간을 잘 맞춰야 하는데, 그것도 잊고 둘이서 감상하다가, 서둘러 숙소로 와 짐을 챙겼다.


구경하느라 끼니도 챙기지 못해서, 주인아저씨가 지난밤 말해주신 싸고 맛있는 동네 김밥집을 대충 설명 들은 대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다. 여자친구가 짐을 챙기는 동안 얼른 다녀오려고 했는데, 헤매는 바람에 김밥을 쥔 채 정류장으로 뛰었다. 그때 먹은 그 김밥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번에도 주인아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감동받았다.


누가 봐도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던 지갑 가벼운 대학생 커플이었다. 백팩 하나 둘러메고 고향집 다락방에서 발견한 몇십 년은 된 것 같은 일회용 필름 카메라 하나 챙겨 초특가 비행기 티켓과 게하보다 싼 에어비엔비에서 잤으니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그날 밤에는 태풍을 몸으로 맞으며 숙소로 돌아갔고, 바람에 창문이 깨질 것 같아 쉽사리 잠도 들지 못했다. 다음날 역시나 비행기는 연착됐다. 그것도 모자라 도착지가 대구로 바뀌었고(이것도 발로 뛰어 겨우겨우 찾아냈다), 난생처음 대구공항과 대구역에 갔는데, 발이 묶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기차표가 없어서 터미널로 뛰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부산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후로 많은 여행을 다녔고 많은 추억을 남겼지만, 이 여행만큼이나 서투르고 극적이며 감동받았던 적이 있을까. 솔직히 감동받은 적은 많다(쉽게 감동받는 스타일이라서). 다시 하라고 하면 고민이 좀 되는데, 정말 즐거웠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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