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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Jul 06. 2020

마마파파걸

부모를 통해서 의견을 전하는 ‘듯’ 보이는 순간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일곱 살부터 열세 살까지 하이든방 바흐방 멘델스존방 따위를 수백 번 들락거리며 피아노를 배운 덕분이다. 그러나 칠 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지금 내 손가락은 힘도 능력도 잃어서 피아노를 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럴듯하게 칠 줄 아는 곡이 없으니 괜히 C F G 코드를 한 번씩 눌러보고는 뻘쭘하게 피아노 뚜껑을 덮는다. 그 코드들을 왜 누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아니어도 칠 줄은 안다는 걸 티 내고 싶은 손짓이랄까.


 손도 손이지만 악보 보는 눈이 조만간 까막눈이 될 예정이다. 낮은음 자리표는 좀 헷갈렸어도 높은음 자리표는 거뜬했는데 요즘은 높은 도 위로 올라갈 때부터는 약간 당황한다. 세어봐야 안다.


 옛날에도 악보를 잘 보는 편은 아니어서 레슨 때마다 다른 음을 친다며 혼나곤 했다. 즉흥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연습한 곡을 검사 맡는 건데도 그랬다. 그러니까 적어도 스무 개의 동그라미에 작대기를 그으며 연습하는 동안 나는 도를 라로 치거나 라를 도로 치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었다. 한 치의 의심이라곤 없이 말이다.


내 악보에는 악보 ‘잘’ 보기가 아니라 악보 ‘열심히’ 보기가 빨간 펜으로 적힐 때가 많았다. 나보다 어린애들 앞에서 낮은 음자리표의 도부터 하나씩 세어 올라가기는 좀 쪽팔렸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나는 대충 도와 라 사이를 오가며 눈치껏 피아노를 쳤다.


 나의 피아노 실황을 엄마가 안다면 투자한 게 아깝다며 한숨을 쉴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 집에 가는 날이면 엄마는 한 번씩 피아노를 쳐보라고 한다. 그럼 나는 얼른 다혜를 앉힌다. 다혜는 학원을 그만둔 이후로도 교회에서 키보드를 친 덕분에 오히려 옛날보다 피아노를 더 잘 치게 되었다. 스무스한 피아노 반주자 옆에서 나는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칠 년의 투자자에게 줄 수 있는 게~ 이 목소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원에 보낸 사람으로서 엄마는 그 칠 년의 시간이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못지않게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칠 년간 피아노 학원에 ‘다닌’ 사람으로서 말이다. 피아노 학원을 1년 다닌 애랑 비슷하게 치는 지금의 실력이 억울한 게 아니다. 내가 억울한 건 그만큼이나 다녔는데도 콩쿠르 한 번 못 나가봤다는 사실이다.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 친구들과 음악실에만 가면 한 번쯤은 피아노 학원에 다녀봤는지, 다녔다면 얼마나 다녔는지가 화두가 됐다. 일곱 살부터 다닌 나 같은 애는 다섯 명 중에 한두 명 꼴 있는 얼리버드다. 일찍부터 피아노를 매만졌다는 뿌듯함에 어깨가 쓱 올라가곤 했다. 그 기분에 취할 틈도 없이 애들은 콩쿠르를 몇 번 나갔고 상은 뭘 받아봤는지에 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콩쿠르라는 걸 나가본 적이 없으니 상을 탔을 리도 없었다. 나름 예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쳐본 경험이라곤 까치 피아노 학원에서 주최한 작음음악회와 5학년 때 전학 와서 잠깐 다닌 소리 음악학원의 학부모 초청 음악회뿐이었다.


 유독 말수가 적어진 나에게 애들은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콩쿠르에 나가본 적 없다고 하면 그렇게 오래 다녀놓고 왜 한 번도 안 나갔냐며 깜짝 놀라 했다. 내가 아는 피아노 좀 쳤던 애들 중에는 이런 애가 나밖에, 아니 나랑 다혜밖에 없었다. 어떤 애는 자기는 진짜 못 쳤는데도 원장 선생님이 나가라고 해서 한 번은 가봤다고 친절히 말해주었다. 그렇다. 난 분명 얼리버드가 맞는데 일찍 일어나기만 했을 뿐 벌레는 하나도 잡지 못한 새였던 것이다.

 

사실은 나도 벌레를 잡을 뻔한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콩쿠르를 나가려면 나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콩쿠르의 ㅋ도 꺼내지 않았다거나 나가지 말라고 뜯어말린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안 나가 놓고 이렇게 억울해하는 이유는 친구들과 얘기하면 할수록 콩쿠르가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었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콩쿠르에 나가기에 어린 나는 너무 겁이 많았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푹푹 찌는 날씨가 거듭되던 한 여름날, 평소처럼 차례로 레슨을 끝낸 나와 다혜는 둥그런 탁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밖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빵빵한 학원에서 최대한 몸을 식히고 나갈 요량이었다. 피아노 교재도 펼치고 딴짓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원장 선생님이 옆에 앉았다. 흰색 종이뭉치를 들고는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보조 선생님한테 ‘**이는 나간대? @@는 어떻게 됐어?’하고 묻기도 했다. 내가 아는 친구의 이름도 종이에 적혀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했다. 힐끔힐끔 엿보고 있는데 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다은아.”

갑자기 들린 내 이름에 깜짝 놀라서 얼른 대답했다.


“네???”

“한 달쯤 뒤에 콩쿠르가 있는데 다은이 다혜도 한 번 나가볼래?”


 콩쿠르라니. 훅 들어온 질문에 잠깐 멍해졌다. 학원을 다니다 보면 간간히 콩쿠르에 나가는 언니들이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빨간 데다 한 올의 잔머리도 나오지 않게 싹 닦아 올림머리를 한 언니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선생님들은 정신이 없는지 알록달록한 드레스 색으로 언니들을 구별했다. 잔뜩 상기된 언니들은 자기들을 태워갈 학원버스를 기다리며 너무 떨린다, 잠을 못 잤다 하며 떠들었다. 그런 언니들 옆에는 드레스와 머리 매무새를 만져주는 엄마들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언젠가부터 콩쿠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피아노보다 옷과 머리와 얼굴 같은 곳으로 바뀌어갔다. 콩쿠르에 나가는 애들이 피아노를 얼마나 잘 치는지, 소나티네를 치는지 소나타를 치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드레스를 입었는지, 다들 어디서 저렇게 옷을 빌리고 머리를 묶고 화장을 받는지가 궁금했다.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꽤 비쌀 거 같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콩쿠르는 화장을 받고 머리를 맡기고 드레스를 빌리는 게 먼저인 행사였다. 가서 어떤 무대에 올라가 어떤 피아노 앞에 앉게 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콩쿠르를 나가보겠냐는 원장 선생님의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가고 싶긴 한데 이걸 내 마음대로 정해도 되나? 드레스를 빌리는 게 비싸지는 않을까? 게다가 나랑 다혜 두 명이 한 번에 나가려면 다른 집의 두 배로 돈이 들 텐데. 콩쿠르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취소가 안 되면 어떡하지?...’ 머리에서는 별의별 걱정을 한 번에 쏟아냈다.


 한정적인 물질과 시간 안에서 원하는 걸 모두 취하며 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아주 부자가 아니라면 대게 시간보다는 물질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선택을 많이 하는 집이 있다면 포기를 더 많이 하는 집도 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수록 무언가를 선택하기까지 고민하고 탐색할 조건이 많다. 고민하는 시간도 따라 길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포기하고 또 그 과정을 이해시키려는 부모 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는 또래보다 조금 더 많은 걸 알고 생각하게 될 확률이 높다. 2학년의 나처럼 말이다.


 세 남매 모두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남자 여자 구분 말고 피아노를 쳐보자는 엄마의 바람 때문이었다. 가족할인이란 걸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포기한 투자가 필요했을 것이었다. 나랑 다혜가 콩쿠르에 나가면 피아노 학원비뿐 아니라 추가로 돈이 나갈 게 분명했다. 학원비만큼이 또 나가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아는 모든 사정을 종합한 나는 겁이 났다. 절대 나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금 오버하자면 이건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걱정과 고민을 몇 초 만에 해낸 나는 원장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지만 매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한테 물어볼게요....”     




 원장 선생님이 콩쿠르에 나갈 건지 물어봤다고 전하니까 엄마는 오래 고민도 하지 않고 예스했다. 생각보다 우리 집 형편이 나아서였는지 엄마가 피아노에 투자하려는 마음이 컸던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도 콩쿠르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그제야 내가 피아노 실력이 되나? 하는 생각이 아주 쬐끔 들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원장 선생님에게 얼른 콩쿠르를 나가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번엔 자신 있게 말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고 헐레벌떡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자마자 떡하니 있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에서 원장 선생님이 어떤 애를 앉히고 레슨을 하고 있었다. 보통 벽을 따라 있는 수납함에서 내 가방을 찾아 바로 연습실에 들어가곤 했지만 그 날은 다혜와 잠자코 레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콩쿠르에 나가는 애였는지 원장 선생님은 평소보다 시범도 많이 보여주고, 셈여림과 빠르기를 악보 이곳저곳에 적고 있었다. ‘역시.. 콩쿠르에 나가기 전까지 저렇게 봐주는구나. 나도 잘 칠 수 있겠군!’ 한참 자신감에 근거가 받쳐지고 있는데 레슨이 끝났다. 나는 바로 원장 선생님께 달려가서 말했다.


“선생님! 엄마가 저희 콩쿠르 나가도 된대요!”

원장 선생님이 뭔지 모를 미소를 짓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재차 말했다.


“원장 선생님! 우리 엄마가 콩쿠르 나가도 된ㄷ...”

“다은아. 이미 신청서 다 냈어. 다은이 다혜는 이번엔 못 나가.”


이게 무슨 말인가! 원장 선생님은 왜 기다리지도 않고 신청서를 냈을까 원망이 차올랐다. 분명 내가 물어본다고 했는데 말이다.


“제가 엄마한테 물어보고 온다고 했는데...”

나는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어 원장 선생님께 말했다. 그렇게 급한 일이었으면 빨리 물어보라고 얘기 좀 해주지. 어제도 전화로 말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점점 더 서운해졌다.


“다은아.”

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다은아. 선생님이 콩쿠르 나갈래? 하고 물어본 아이들은 다들 바로 나가고 싶다고 하더라~ 엄마한테 물어보겠다는 애는 너뿐이었어. 진짜 나가고 싶으면 물어볼 새가 어디 있어? 바로 대답부터 하고 보지~ 콩쿠르 나가고 싶으면 다음번에는 선생님한테 꼭 말해!”


 원장 선생님이 내 마음도 모르고 나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에게 나는 자기 생각도 없이 엄마한테 물어봐야만 하는 마마걸로 비쳤던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도, 엄마에게 이 말을 전할 때에도 원장 선생님의 미소가 머릿속에 계속 플레이되었다.     

 

 그 날의 교훈으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정을 내려버리는 아이가 되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오히려 묻고 따져볼 것은 더 늘어났다. 돈이 들어갈 곳은 차고 넘쳤으며 그와 비교하면 콩쿠르는 애교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이나 걸스카우트 신청서를 나눠 주면 친구들은 나한테 와서 할 거냐고 물어봤다. 나는 엄마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  수학 학원에서 다음 달에도 다닐 거냐고 물어봤을 때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엄마랑 상의해볼게요.

 

 중학생 때는 미술학원에 딱 하루 다니고 그만둔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원비가 부담되었는지 아빠가 학원 원장 선생님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한 거였다. 하루 다녀보더니 다은이가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민망한 것보다야 내가 민망한 게 여러모로 이득일 거라는 생각에 그때도 그냥 가만있었다.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 앞에서 가만있던 마마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점점 더 강력한 마마파파걸이 되었다.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하고, 부모를 통해서 의견을 전하는 ‘듯’ 보이는 순간순간마다 내가 쥐고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며 넘겼다. 그래야 앞으로 살아가기에도 마음이 편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도 가끔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는 바를 정 기호처럼 마음에 하나씩 새기고 넘겼다. 나중에라도 이건 꼭 해보자고 스스로 약속하는 목록이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보니 선택도 포기도 나의 몫이다. 요 몇 년 사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엄마 아빠에게 물은 적이 없다. 하고 싶던 일을 할 수 있는 돈이 있으면 했고 돈이 없으면 스스로 합의 하에 다음을 기약한다. 그렇게 얻은 것도 포기한 것도 쌓인다. 많지 않은 돈 안에서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생겨난다. 납득 가능한 포기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독립은 참 반갑고 이롭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우선을 아이들에게 대부분 양보했을 부모님의 긴 시절을 생각한다. 그 돈과 투자와 마음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느껴진다.


 이제 와 콩쿠르를 나갈 수는 없고 언젠가 미술학원 취미반을 다녀보고 싶다. 많은 우선순위를 이루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고민 없이 문을 열어젖혀야지. 내가 그린 그림을 어린애처럼 자랑하는 마마파파걸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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