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 쓸수록 내가 알게 된 것들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고 뭘 얻었더라... 아. 순서를 바꾸어 궁금해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해 뭘 포기했더라... 그렇다. 인어공주는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어줬다. 무려 말하는 능력을 포기했다는 말이다. 왕자와 인어공주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지. 그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던 동화를 왜 계속 짚어보냐면 내가 목소리를,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생 때부터 스무 살 초반일 때만 해도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라 자부했다. 교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앞에 나가 말하는 역할은 주로 내 몫이었다. 전달하려는 얘기는 사실 상 몇 초 만에 끝나니 일단 앞에 나가면 분위기를 띄우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진행 중에 갑자기 누군가를 주목시켜 은근히 놀리곤 했는데, 꼭 진행할 때가 아니어도 여럿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랬다. 내가 누구를 놀리면 사람들은 웃었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이 다 같이 웃기에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일단 앞에서 웃기고 뒤에서 사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장난이나 놀림 때문에 상처 받았다면 정말 미안해. 그건 진심이 아니야. 내 마음 알지?” 이건 몇 년간 내가 쓴 편지에 빼먹지 않고 등장한 말이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듯이 쓸 수 있는 건 지금의 내가 조금은 말을 조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일 테다. 대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나의 말이 무책임하고 무례하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내가 역으로 놀림의 대상이 되어 큰 창피를 당했다거나 모욕감을 체험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단번에 어떤 사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내 말과 생각을 서서히 변화시킨 건 무엇이었을까?
나이가 들면서, 또 말에 대한 여러 책과 방송을 접하면서 여러 깨달음이 복합적으로 왔겠지만 아무래도 나를 변화시킨 중심엔 확실히 글쓰기가 있다. 글을 쓰는 목적이 처음에는 ‘나’에게만 있었다. 감정을 오래 깊숙이 품는 나로서는 그 감정을 어디에 덜거나 풀어내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내게 맞는 도구였다. 내가 쓴 단어들에 마음속 감정이 스며들어 가는 게 좋았다.
글을 쓰다 보니 더 적합한 명사와 동사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졌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내 기분과 마음은 어떤지 살피는 일이 선행되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행동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를 위해 쓴 글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쓰는 나와 말하는 내가 달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동안 말은 내게 너무 쉽고 빨랐는데, 글은 어려운 만큼 더뎠다. 어렵게 쓰고, 느리게 쓰며 나는 ‘쓰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하는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 말하는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는 걸 쓰면 쓸수록 나는 알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입안에서 말을 굴리는 내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기쁠 때가 더 많다. 어떤 말을 끝까지 꺼내지 못하고 집까지 가져온 날엔 뿌듯하기까지 하다. 대부분 그때 말하지 않기를 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화중에 번뜩 떠오른 개그 소재가 있어도 기분이 상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대로 묻고, 좀 더 거친 표현과 자극적인 어투가 맛깔날 것 같아도 싱겁고 건강한 대화가 오래 남는다는 걸 기억하려 애쓴다.
인어공주가 말을 할 수 없게 된 게 어린 나는 너무 분통했었다. 사람을 만들어준 대신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을 빼앗아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말할 수 있는 것이, 내 생각과 마음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일까?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고 쉬우면 진심을 전하기가 어렵다. 진심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너무 변화무쌍한 것에는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머뭇대는 동안 나는 누군가를 한 번 더 생각한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진심이 깃든다. 그것을 쓰면 쓸수록 나는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