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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ori Feb 27. 2018

무엇이 정의를 실현하는가

더포스트 (2017)


영화 [더포스트]는 트루먼부터 닉슨까지 미 행정부가 30년 가까이 감췄던 베트남전의 더러운 이면이 폭로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의 중심에 있던 워싱턴포스트지(Washington Post)의 첫 여성 발행인 '캐서린 그래햄' (메릴 스트립)을 통해 언론 통제와 여성 차별로 얼룩졌던 1970년대초 워싱턴 정치의 민낯을 들춰낸다. 과거를 기억하는 작업이지만, 언론과 여성이 공개적 힐난의 대상이 된 미국의 현재와도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더포스트]의 주제는 명확하고 답안은 모범적이다. 할리우드가 배출한 최고의 연출력과 연기로 쓰여진 세련된 교과서같다.


메릴 스트립,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영국 가디언지는 이들의 결합이 헐리우드의 성 삼위일체(holy trinity)라 칭했다.


영화 속. 정의를 실현하는 길은 험난하다. 베트남전의 추악한 진실이 담긴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확보하여 폭로하자는 지극히 도덕적인 결정은 영화 내내 현실적 걸림돌과 딜레마에 직면한다. 캐서린의 워싱턴 정계의 오랜 '친구'들은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의 작성자이자 책임자다. 막 상장된 위싱턴포스트의 재정적 상황은 폭로의 후폭풍을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 주변 조언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며, 백악관은 추가 폭로에 대해 강도 높은 법적 처벌의 가능성을 전하며 경고한다. 이 딜레마의 최종점에 캐서린이 있다. 그리고 개인, 회사, 국가 차원의 우려와 협박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그녀는 동료도 적도 모두 남성인 1970년대 미국 사회에 외롭게 서있는 소수자다.


(좌) 맥나마라 전국방부 장관. 그래햄의 오랜 친구이자 펜타곤 페이퍼의 당사자다. (우) 그래햄은 남성주류 사회에서 늘 외롭다.


무엇이 캐서린으로 하여금 위험하지만 정의로운 폭로의 길을 택하게 하였을까. [더포스트]는 선한 개인들의 신념과 행동들이 만든 연결 고리에 집중한다. 최초 '펜타곤 페이퍼' 폭로자,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들, 편집장(벤 브래들리-톰 행크스) 개개인의 엮어서 만든 고리다.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이 마침내 이 완성 직전의 고리 앞에 섰을 때 머뭇거리며 최종 결정을 내뱉는다. "Yes... yes... um... big decision... Let's publish, let's publish!". 회사의 정치적, 재정적, 법적 위험을 감수하고 언론의 정의를 외친 이 순간, 그녀는 마침내 워싱턴포스트의 진정한 발행인이 되고, 미국 사회는 언론의 자유를 향해 한걸음 진일보한다.



개인의 신념을 넘어


실제 벤 브래들리와 캐서린 그래햄의 모습. 1970년대초 사진.


이 개개인들의 신념은 분명 고귀했지만, 신념만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더포스트]의 메시지는 현실적이기보다 환타지적이며, 교훈적이기보다 역효과의 위험이 있다. 첫째, 신념이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 임팩트를 내게끔 하는 전략적 사고가 빠져있다. 영화 [미스 슬로언]가 대비되는 지점이다. [미스 슬로언]이 판타지임에도 강력한 현실적 어필을 지녔던 것은 영화가 주인공의 뜨거운 신념이 아닌 차가운 전략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역시 홀로코스트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변호인단의 전략이지 역사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다. [더포스트] 초반부는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한 염탐질, 워싱턴포스트지 기자의 [펜타곤 페이퍼] 최초 폭로자 추적 과정과 같이 이런 전략적 고민이 가득하지만, 정작 투자자와 미 행정부를 상대로 한 최종 한판을 앞둔 순간에 캐서린과 벤에게는 전략적 준비 없이 언론의 자유라는 신념만 남아있다. 실제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비장하고 아름답지만 무모한 장면이다. 처칠의 고집만이 강조됐던 [다키스트 아워]를 보며 느껴졌던 불편함이 떠오른다. 신념만으로 옳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더포스트]에는 그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더포스트]는 체제를 좁게 바라본다. 영화는 당시 체제를 닉슨 행정부로 국한 지어 워싱턴포스트지의 상대로만 그리지만, 또 당시 미국 체제 속에는 더 다양한 목소리와 행위자가 있었다. 특히 일부는 워싱턴포스트지의 폭로를 지지하고 가능케 한 아군이다. 예컨대 폭로의 동기와 모멘텀을 유지하는 데에는 개인의 신념 외에, 언론의 자유가 명시돼있는 헌법과, 언론 자유의 전통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워싱턴포스트의 승리는 영화 마지막 순간 폭로 결정이 적법하단 대법원의 결론으로 완성된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요약되어있는 'the press was to serve the governed, not the governors'라는 대사 역시 대법원의 판결문이다.


그러나 이런 결정적이고 가시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더포스트]의 찬사에는 체제에 대한 믿음이 빠져있다. 단순한 과거의 낭만적인 기억이 아닌 현재와 대화를 시도할 의도도 있었다면, [더포스트]는 언론인의 사명감뿐 아니라 당시 미대법원이 행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혹은 대항할 수 있었던) 그 건강한 체제의 모습도 짚어줬으면 어땠을까. 체제를 뒤엎어야만 저항이 아니다. 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저항도 있다. 펜타곤 페이퍼 폭로는 후자에 가까움에 [더포스트]에는 워싱턴포스트가 기존 체제의 틀과 원칙을 활용하고, 체제 속 아군과 대화한 지점들이 상대적으로 묻혀있다는 인상이다.  


워싱턴포스트지가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모습.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체제의 불합리적이고 비도덕적 행위에 대항한 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역사는 옳은 자가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얘기한다. 1971년의 이 흔치 않았던 위대한 승리를 그리면서, 불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체제를 이에 대항하던 자들의 신념과 대비시키는 연출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 현실에서는 냉철한 전략적 접근이라던가 (허구지만 [미스 슬로언]은 이 면에서 정말 탁월했다), 제도권 모두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 균형된 시각도 필요로 한다.


때문에 개인의 신념에 지나친 무게를 둔 선택은 진부할 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 대한 오해의 소지도 있다. [더포스트]가 지니는 무게감을 고려했을 때 무조건적 찬사를 보내는데 주저케되는 이유다. [더포스트]가 보기 드문 세련된 교과서임에 틀림없지만, 이보다 더 미묘하고 뉘앙스 있는 텍스트와 함께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이유다.





더포스트, The Po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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