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와 거리두기
정확히는 더 이상 너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줄 수가 없다고 했다.
친구는 c.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 내 친구.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을 터 놓던 우리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 우리 사이에는 화자와 청자가 나뉘게 됐다. 그 시기는 딱 잘라 언제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친구가 취직을 하던 재작년 끝자락쯤.
또래보다는 조금 늦게 취준을 시작한 친구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의 회사가 있는 쪽에 구직을 하게 됐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지역에서 결혼 상대 하나만 보고. 친구가 원서를 넣을 수 있는 곳은 그 지역에 단 하나. 친구는 그게 자신의 유일한 선택지라고 했다. 그 점 때문에 친구가 결혼을 서두르는 점을 만류했지만 이미 양가 집안에서 결혼 준비를 시작한 터라 내가 더 만류할 명분이 없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친구는 부서에서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당했고 그로 인해 우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냥 들어주며 상사와 동료들을 욕하다가, 그다음에는 이런저런 제안을 제시했다. 다른 부서로 이동해보는 건 어떨까. 친구는 다른 부서에서는 3교대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자신이 제대로 쉬는 날이 없다고 했다. 주말 부부를 해보는 건 어떨까. 친구는 이제 막 신혼인데 신혼부터 주말 부부를 하는 건 싫다고 했다. 아예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 친구는 그럼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럼 나는 그러길래 내가, 까지만 말하고 다음 말은 삼키게 되는 것이었다.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은 푸념 섞인 연락이 오고, 그러다 가끔은 울며 거는 전화를 계속 받아주었지만 그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나누는 것이 친구라지만 우리가 근래 나눴던 대화에 즐거움은 없었다. 내가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친구가 힘드니 약 올리는 것 같은 기분에 차마 할 수 없었고, 내 일상에 트러블이 생겨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어도 친구에게 말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의 일상에서도 언제나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텐데 내게 말해주는 것들은 왜 그리 나쁜 일들 투성이인지. 나는 좀 더 즐거운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나만의 일로도 버거운데 내가 사랑하는 친구라는 이유로 친구의 힘듦까지 내 마음에 오랫동안 지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지켜야 했다. 몇 번의 경험들로 무너진 마음이 얼마나 내 삶을 망가뜨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살아 남기 위해서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나에게 하나하나 말하는 것도 힘든지 대학 친구들에게 직장상사를 욕한 카톡을 캡처해서 나에게 전달해주는 그 무성의에 나는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너는 나 말고도 털어놓을 사람이 많지. 남편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친구들도 있지. 그 중 하나가 나인 거지. 그러면 이제 그 무리에 당분간 나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장문의 카톡을 답장으로 보냈다.
너무 서운하지 않으면서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당분간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네가 터놓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 공감해주고 이런저런 대안들도 말해주었지만 너에게는 모두 소용없는 일들이었다고. 너는 화자로, 나는 청자로 고정이 되어버린 우리의 대화는 너의 힘든 직장생활이 보통의 주제였고 너무 힘들어하는 너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그래도 처음엔 이런 일들이 너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아 계속했지만 나도 내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어졌다고. 지금 너의 상황이 얼마나 최악인지는 알고 있고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내가 너의 친한 친구여서라는 것도 알지만 지금 내 마음에 그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딱히 답장을 기다리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아직 친구에게는 답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