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수목금, 중학교 시절 가기 싫은 학교를 억지로 갔던 것처럼 회사를 갔었다. 그렇게 5일을 녹이고 주말을 맞이했다. 집에 무료하게 있기는 싫어서 어제 사놓은 책을 집어들고 집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토요일 오전 책을 읽는 것으로 주말을 시작하는 게 꽤나 괜찮게 느껴졌다.
카페에 들어서서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아아를 시킬까 했는데 추운 날씨에 아아가 별로 땡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뜨거운 커피는 싫었다. 조심조심 뜨거운 커피잔을 들어 조금씩 호록호록 마시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누룽지 국물 같은 것을 그렇게 공들여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그니처 초콜릿” 저거다. 뜨거운 건 매한가지지만 달달하고 포근한 초콜릿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책을 읽는다. “대규모 시스템 설계 기초” 나는 IT시스템 개발자이다. 나는 이런 책이 재미있다. 한 참 읽다가 잠깐 휴대폰을 뒤적인다. 연락이 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습관적으로 업비트, 토스, 케이뱅크를 들어가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카오톡을 들어간다. 6개월 전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프로필을 바꿨다고 표시된다. 최근에 찍은 사진 9장을 3X3 배치로 콜라주한 사진이다. 여자친구는 어떻게 지낼까? 그녀 생활의 단편을 보며 나는 그녀의 마음을 궁금해 한다. 이건 미련일까?
나는 그녀 생각을 많이 했다.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그녀의 귀여운 눈과 입술의 형태를 떠올리기도 하고, 뜨거웠던 지난 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종종 꿈 속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가상현실 속에서 나의 마음이 한결 나았다. 헤어진 후 누가 이상형을 물어보면 나는 전 여자친구를 떠올릴 뿐이었다. "전 여자친구가 내 이상형이야." 라고 말 할 수 없어서 대충 이상형이 없다고 얼버무렸다. 그녀보다 더 애정스러운 사람이 내 앞에 또 나타날까?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이전에도 몇 번 해보고 싶었는데 참았다. 몇 번을 참아도 다시 연락 해보고 싶은 것을 보니 결국에 한 번은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연락해서 뭐?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 연락해서 무얼 어쩌자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다시 만나자고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왜 연락을 하고 싶은지, 그냥 그리운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개발을 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챗GPT에 물어본다. 얼마나 똑똑한지 대부분의 경우에 정확한 답변을 내어준다. 나는 요구만 하고 실제 개발은 GPT가 하는 상황도 자주 연출되곤 한다. 그 관성 때문인지 난 복잡한 내 마음을 GPT에 털어놓고 싶어졌다.
우리가 왜 헤어졌을까? 표면적으로는 너가 나에게 헤어지자 했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나에게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현실적인 차이 앞에서 나는 너와의 미래를 그리는 것에 겁이 많이 났다. 불행한 내 집안과 너무나 평범한 나, 그와는 반대인 너의 집안과 예쁜 너. 나는 그 차이가 버겁게 느껴졌고 그러한 감각 속에서 너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불편했다.
챗GPT가 답변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헤어질 때도 그리고 지금도 네가 스스로를 많이 몰아붙였을 것 같아”
내 마음에게 들려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뻔한 답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선의 답변을 가장 필요한 그 시점에 듣게 되니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가정환경에 대한 원망’,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 이 두 가지가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였다. 전 여자친구와 관계 속에서 그런 마음이 자극될 때마다 더 잘나지 못한 스스로가 싫었다. 그런 부정적인 감각 속에서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헤어진 후 주변에서 종종 소개받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 때마다 요즘엔 별로 의욕이 없다며 농담조로 거절했었다. 농담조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마 부정적인 감각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부정적인 감각을 떨쳐버리고 싶다. 부정적인 감각은 사실 의미없는 노이즈에 불과하다. 내가 최고는 아닐지라도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그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고, 내 나름의 이야기와 멋진 생활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는 현명함을 떠올린다.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부정적인 노이즈로부터 자유로워진 이후에 혹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서 내 마음은 이랬다고 말해주고 싶다. 담담하게 그냥 그랬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