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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편선 May 06. 2016

세상에는 중립지대가 없고, 사랑에도 중립지대가 없다.

포크뮤지션 권나무 인터뷰

"세상에는 중립지대가 없고, 사랑에도 중립지대가 없다."


인터뷰이 _ 권나무

인터뷰어 _ 단편선


일시 _ 2016년 3월 14일 금요일 밤 11시

장소 _ 서울 마포구 동교동 한잔의 룰루랄라     


이 인터뷰는, 주간 워커스WORKERS 창간호의 “고급진” 코너에 실렸던 인터뷰를 인터뷰어의 기호와 의도에 맞게끔 다시 편집하고 지면관계상 축약된 이야기를 더욱 세세히 풀어낸 버전이다.     


권나무는 음악가다. 주로 포크기타 한 대에 목소리를 얹는 조촐한 편성으로 공연하며, 간혹 친구들과 조금 더 풍성한 사운드로 연주하기도 한다. 어쨌건 포크뮤지션이다. 2014년 발매했던 첫 번째 앨범 [그림]에 이어, 최근 두 번째 앨범 [사랑은 높은 곳에서 흐르지]로 다시 돌아왔다. 2015년과 2016년, 연달아 한국대중음악상 포크 부문에서 수상함으로서 근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인터뷰어인 단편선 역시 음악가로서, 4인조 사이키델릭 포크 록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의 디렉터이자 그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인 회기동 단편선으로 주로 알려져있다.     


권나무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냥 어느 날 권나무란 이름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유튜브에 올라와있던 라이브 비디오들도 보게 되었다. (조용호 씨와 함께 연주한 비디오였다.) 그러면서 경남에서 주로 활동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주로 가는 홍대앞의 카페 한잔의 룰루랄라에서 그의 노래가 종종 나오길 시작했다. 들을 때마다 좋았다. 만나서도 사람이 참 좋았다. 권나무는, 자신의 음악에 비해, 조금 더 서글서글하고, 살짝 더 다부지며 자기주장 확실한 사람이다. 친구 사이인 주제에, 새삼스레 인터뷰라는 명목으로 만나긴 했지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물었다. 마침 늦은 밤의 한잔의 룰루랄라였던 탓에, 우리는 세븐브로이 IPA를 한 모금 씩 들이킨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 _ 2016년 제13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포크노래 부분에서, 공교롭게도 또 수상하게 되었잖아. 그런데 상을 받은 “이천십사년사월”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노래란 말이야. 나무는 지금 교사도 직업으로 삼고 있는데, 정치적인 부담이 없었나?


권 _ 일단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만약 내가 그 앨범에 참여했다고 해서 징계를 받거나 불이익이 온다면 내가 교사를 할 이유가 없는 거지.     


단 _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권 _ [다시, 봄] 앨범에 참여하는 것을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이천십사년사월”이란 곡을 만든 게 정치적일텐데, 그것마저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그냥 내가 내 방에서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다 정치적인 게 되는 거야.     


단 _ 그걸 모두 정치적이라 보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


권 _ 그건 어쩔 수 없지. 거기서부터는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거니까. 여하간 나는 정치적인 압박감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고… (압박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가 여럿 있을 텐데, 일단 나는 그 노래를 공식석상에서 연주한 적이 없어. 레이블마켓에서 앨범 발매에 맞춰 부른 것과 팬들이 앵콜로 요청해주셔서 불렀던 것 빼곤 없지. 사람들 앞에서 부르기 위해 만든 곡이 아니기 때문에.     


단 _ 원래는 그냥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린 데모음원 아니었나?     


권 _ 그 노래를 세월호 사건 이후로 몇 달 있다 10월쯤인가에 썼어. 그때까지 너무 무기력이 지속돼서. 당시에 수많은 음악가들이 거리로 나와서 노래하고 했었는데, 그걸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광경이 나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세월호와 관련된 제안이 와도 다 못하겠다고 얘기했지. 그러다 세월호 1주기 쯤이 되었는데 사이 씨에게 연락이 와서 “이천십사년사월”을 세월호 1주기 추모 문화제 비슷한 곳에서 같이 부르자 제안이 온 거야.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로 공연할 자신이 없고, 그런 식으로 모이는 자리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있다.”는 요지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지. 이를테면 광화문 한복판 같은 데서 노래하자는 것인데…     


단 _ 스펙터클의 중심에 서는 거지.


권 _ 나는 중심은커녕 앞에 나설 자신도 없었어.     


단 _ 사실 나도 나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게, 나는 사회참여적인 이벤트에 종종 참여하는 음악가지만 세월호 사건 때는 나 역시 음악가로서 뭔가를 함께 하거나, 그런 적이 없다?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는데, 그냥 뭘 못 하겠더라고. 내가.     


권 _ 나도 뭘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서가 갖춰지지도 않았고. 그런데 이 말을 조심스레 꺼내는 이유는, 그에 대해 거리에서 노래하고 싸우신 분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그 분들을 폄훼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공연 다 취소하고 집에만 있었어. 그러다 1년 지나 사이 씨 제안을 받고,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이 이유로 거절했던거야.


단 _ 나는 그게 정직한 거라 생각해.


권 _ 만약 그때 내가 발을 이상한 방식으로 빼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지. 만약 그러면 나는 우리가 다 망할 거라 생각했어.     


단 _ 어떤 의미에서?     


권 _ 더 이상 함께 음악을 할 수 없어지는 거지. 만약 내가 여기서 뻥을 치고,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면, 내가 나중에 사이 씨 만나서 반갑게 인사드릴 수 있겠냐고. 아무튼 사이 씨에게 그렇게 말씀드리니 다행스럽게도 충분히 존중해주셨는데, 이후에 다시 “그럼 음원으로 [다시, 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어떨까?” 제안을 해주셨지. 3일 정도 고민하다가 ‘그래, 그건 우리의 기록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음원을 드렸어. 그 다음에도 발매 공연도 콘서트도… 아무 데도 못 갔지. 물론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지만, “이천십사년사월”이라는 노래를 무대에서 부를 수 있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단 _ 나 역시 그런 게 있어. 내가 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만큼의 범위에서 벗어나면 취지나 가치, 이런 것을 떠나 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편이야. 물론 마음이 아주 동할 때도 있지. 이를테면 작년에 대구 퀴어퍼레이드에서 초대해주셨는데, 나는 LGBT 운동을 지지하지만 헤테로잖아? 그런데도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영광스러웠던 거지. 그런데 세월호 사건은 무게감이랄까… 뭔가 너무 달랐는데.     


권 _ 공연을 할 수 없는 건 단순한 이유야. 슬픈데 어떻게 노래를 부르겠어? 예를 들어, 내일이 공연이라고 해. 그런데 내가 지금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어. 그래도 공연을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사실 공연을 하지 못하는 거잖아. 내가 노래하는 감정이랑 내가 처한 감정이 너무 이질적이잖아. 나는 나에 대한 수많은 시선이 존재할 거라 생각해. 세월호에 관한 곡을 만들었어. 그런데 발매공연에도 그렇고, 도통 나타나질 않아. ‘교사라서 그렇겠구나.’ 하고 지레짐작 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어떤 방식으로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는 자체는 두렵지 않아. 하지만 내 최선은 그것이었어. 마음이 노래를 할 수가 없는데. 교사라고 교육청 같은 데서 감사 나올 거라 생각해본 적 없다? 혹시 그러면 잘려야지 뭐.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거리에서 물대포 맞는 사람들처럼 살진 못하니까, 부채의식은 있을 수밖에 없지.     


단 _ 나는 모든 사람이 물대포를 맞으러 나와야 한다 생각하지 않아.


권 _ 내가 음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아예 내 자신이 세월호에 대한 앨범을 냈겠지. 그런데 나는 그냥 되게 열 받고 슬펐어. “이천십사년사월”은 희망이 없는 곡이야. 남을 위로할 수 있는 곡이 아니라니까, 사실? 나는 되게 무기력한 바닥에서 만든 거야.     


단 _ 노래에 클라이막스가 없잖아. 구조적으로는, 그냥 맥락 없이 시작해서 맥락 없이 탁 끊기니까, 허무하지.


권 _ 곡 쓴 날 밤에 원테이크로 녹음하고 그냥 끝낸 거야. 일기의 한 페이지지. 나는 그 곡에 당위를 담지 않았어.     


단 _ 내가 좋아하는 권나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낮게 읊조리다 스트레이트하게 탁 트이는 순간의 권나무 같은데, 그런 도약에서 발산되는 음악적인 쾌감이 매력적이거든. 그래서 나는 상을 받았을 때, 물론 좋은 노래지만, 의아했던 것이 나는 그 곡이 권나무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곡도 아니고 감동적인 곡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거든.


권 _ 내가 내 노래에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고 노래의 (정치적인) 의미에 집중해 상을 받게 된 거라 자신을 의심하게 되면, 나는 내 음악과 가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로 상을 받게 된 사람이 되어 버리잖아?     


단 _ 세월호 노래를 불러서 상을 탄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권 _ 나는 그게 싫어. 그럼에도 올라가서 처음 한 말이 세월호 노래라고 한 거야. 그게 사실이니까. 우리가 어떻게 매순간 솔직하게 살아? 뻥도 좀 쳐야지. 그런데 한국대중음악상은 영예로운 자리란 말야. 함부로 대하면 안 돼. 내가 활동가라면 확실하게 선을 긋고 (세월호에 관한 노래를 불러서) 의미 때문에 상을 받게 되었다 공표했겠지. 그런데 그건 내가 바라는 세상이 아니야. 의미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정치지. 하지만 사람들이 의미에만 편중해 상을 준 것은 아니라 생각해. 정치 혹은 반대로 개인만이 답이다, 이런 식으로 치우쳐져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아.     


단 _ 나는 주위에 활동가들도 많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좋은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싶어.     


권 _ 나는 ‘중립은 없다’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나를 중립지대에 있다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해서 중립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야. 나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살고 있고, 내 기준에 따라 냉정하게 움직이고 있어. 만약 내가 세월호에 관련된 시국선언을 하고 다음 세대에게 세월호 사건에 대해 가르칠 거라면 중립지대에 있으면 안 되겠지. 그런데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건 국가에 대한 반항심이 아니야. 학교에서도 부조리하거나,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생겨.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학교에 대해 욕하진 않아. 오히려 나는 아이들에게 어른을 공경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단 _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경 받아야해. 그런데 요새는 존경이란 걸 찾기 너무 어려운 시대기도 해.     


권 _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지 폄하하는 사람이 아냐. 나는 삶의 균형을 말하는 사람치고 균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별로 못 봤어.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색깔이 만들어지는 거지, 삶을 살기 전에 균형을 논하는 사람치고 멋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나는 세월호와 관련해서 나의 삶을 살았지 바깥에서의 삶을 살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정부의 말을 하나도 안 믿어. 하지만 운동에 동참할 순 없었던 거야.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살면 부딪히게 되는 것도 있어. 개인은 무력하거든. 개인의 양심에만 비추자면 나는 내 방에서 다 해낼 수 있어. 내가 거리로 나가는 날은 내가 화나고 물리적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선택이 있을 때겠지. 내가 뭔가를 선택한다면 정치적으로 선택하는 거야. 하지만 내 방에서 만들어진 그 기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하는 거야. 그러면 누군가 “권나무, 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 네 고집대로만 살거냐?”라고 묻겠지. 나는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뭔가를 선택하게 될 거야. 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보다 더 넓은 뜻과 순수한 희생을 하는 분들에겐 비겁해보일지도 모르겠지만, 31살 지금의 권나무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해. 나도 어떤 파워게임에서 수를 두어야한다 생각되면 그때 뼈를 묻겠지. 나는 그럴 자신이 있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뭐라 얘기하건 다 뻥이지.


단 _ 어쨌건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을 회피하진 않겠다는 얘기기도 하잖아.


권 _  (이런 내 태도를) 비겁하다 할 수도 있고 괜찮다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인류에 관련된 근본적인 논쟁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는 일단 내가 맡은 일을 할 거야. 내가 맡은 아이들이 나보다는 더 멀쑥한 인간으로 클 수 있도록. 내가 당장 가치 있다 여기는 것들에 대해 가르치고, 평일에는 술 안마시고 일찍 일어나고. 당장의 내 일을 하기도 바쁜데 그런 큰 관념적인 것에 대해 에너지를 쏟기 시 작하면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당당한 게 줄어들 것 같아. 그래서 수상했을 때 “나는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대중음악상에 누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거리에서 노래하고 나서는 사람들과 이 영예를 나누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거야. 이제는 이후를 생각해야지. 그에 걸맞은 음악을 들려줘야지. 부끄럽지만 쪽팔리진 않아야지.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잖아. 나는 언제나 부끄럽지만, 쪽팔린 것은… 가령 내가 어떤 여자를 정말 사랑해. 그런데 결혼을 고민하다 집안을 보고 들이대야겠다 마음먹는다면 그건 쪽팔린 거지. 쪽팔림의 기준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 어떤 사람은 적당히 사기 쳐도 안 쪽팔려해. 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나도 이렇게 복잡한 인간이야. 너무 복잡해… 국가는 엉망이고 사람들은 자기 방식으로만 이야기를 하고 나도 그 중 한명인데,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큰 상이 내게 주어진 바람에 내 방에서 그린 조그만 그림이 나를 깊게 뚫고 나가버렸어. 나란 사람의 정서가 많은 사람에게 드러났고, 또 운 좋게 공감해준 사람도 있었고. 그건 사실이니까 나는 내 음악에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 앞으로도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말하는 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고 싶은 거지. 내가 만든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공감 받고, 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줄 거라 믿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것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모든 예술가들의 꿈이잖아.     


단 _ 시기나 질투 같은 건 아니지만, 나는 나무에 대한 개인적인 부러움이 있어. 나는 자신이 음악의 주체가 되려면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전업 음악가니까 이걸 팔아야만 먹고 살 수가 있잖아. 그게 힘들때도 있지. 그런데 나무는 교사잖아?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선생님을 택했는지 전부터 궁금했어.


권 _ 내가 계속 음악을 주도적으로 해내야한다, 정치에 있어서도 주도적으로 선택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사실 반증인 것이, 내가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살기위해 낑낑대는 거야. 교사도 그렇게 선택하게 된 건데,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잘 지냈는데 사춘기를 지나오면서는 그렇질 못했어. 대학에서도 잘 지내지 못했지. 그래서 인생이 이게 뭐냐, 라면서 그냥 살았는데 그때 내게 유일하게 즐거웠던 행위가 공부방에서 아이들 가르치거나 옆에 있는 친구 공부 도와주거나 이런 것들이었어. 내가 진짜 호인이면 아무나 다 친해지고 그럴 수 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관계가 힘들었어. 그런데 교사는 공식적으로 학생들과 서로 존중이 깔린 상태에서 관계를 맺잖아. 교대를 갔던 건 어머니가 교사셨기 때문인데, 어릴 때 어머니 교실도 많이 갔었어. 어머니가 학생들과 맺는 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풍경이 나를 안정시킨 거 같아.


단 _ 상호존중이 베이스로 깔려있는 관계, 그건 음악가가 다른 음악가들과 맺는 관계와도 비슷할 것 같은데.


권 _ 무대랑 교실이랑 똑같다니까. 깊이 들어가면 본질적으론 조금 다르겠지만.     


단 _ 이 질문을 했던 이유는, 내가 나무 씨의 학생도 아니고 직장동료도 아니니 실은 어떻게 가르치고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그런데 나무 씨가 계속 해온 것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이잖아. 그런 걸 보면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취하는 태도가 권나무가 음악가로서 살아가는 태도와 맞닿는 부분이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권 _ 나는 갭을 전혀 못 느낀다. 갭은 오히려 무대에 올라서기 전에 매무새를 단장하거나, 이럴 때 느끼지. 오늘도 인터뷰 하기 전에 이 모습 이 상태 그대로 수업하고 왔어. 물론 음악가로서 취해야하는 태도와 교사로서 취해야하는 태도는 다르지. 하지만 내가 인간적으로 사람을 대해야한다는 점에선 펑크록커건 교사건 맞닿는 부분이 있을거란 말야. 어쨌건 내 삶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일이니까, 갭을 못 느끼지.


단 _ 교사로서의 마음가짐과 공연에서의 마음가짐이 같아?


권 _ 똑같지. 물론 교실에선 더 조심해야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학교의 불합리한 시스템과 권위주의, 공무원 특유의 고리타분함 같은 것에 대해 다 쏟아낼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야.


단 _ 누구나 공연 전에 마음가짐을 컨트롤 할 텐데, 이를테면 내 경우에는 요구되는 퍼포먼스가 나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렇게 마음을 세팅하는데.


권 _ 나는 퍼포먼스를 하려는 나를 끊임없이 거세해. (웃음)


단 _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권 _ 나도 대학 다닐 시절에는 편선처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걸 선호하는 쪽이었어. 그런데 그게 불편했어. 그때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됐어. 그런 것에 대한 패배의식이 있지. 나는 아직도 시원하게 잘 지르는 메탈 밴드를 보면 피가 막 끓어.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이라도 내게 편한 옷을 입은 거지. 내 음악에 대한 자존감이 생기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도 내게 가치 있고 건강한 일이구나 하는 걸 알아간 거지.     


단 _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을 알려주거나, 하는 것도 비슷한 마음일까?     


권 _ 그렇지. 책상화 그리기 대회. 그거 낙서 아니야. (매체에 보도될 때) 내가 책상화 그리기 대회를 낙서라고 보도하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했어. 그런데 (PD가) ‘책상에 낙서를 허하라’는 식으로 싣고 싶다고 설득했어. 책상화 그리기 대회는 총 12시간 정도 걸린 거대한 프로젝트였어. 내가 싫어하는 교사는 이런 사람이야. “책상에 낙서하고 싶으면 해.” 왜 책상에 낙서를 해? 책상에 낙서를 권장하면 안 되지. 하지만 낙서를 하는 자체가 잘못된 건 아냐. 책상화 그리기 대회는, 미술시간에 은수(학생)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너무 힘들어하는 거야. 그래서 조금 쉬어, 이랬더니 도화지를 내려놓고 책상에 갈대를 그리는데 그게 도화지에 그린 것보다 훨씬 좋은 거야. 그래서 아이들한테 이번 소묘시간만 마치고 다음에는 책상에 연필로 제대로 그려보자 그랬지. 그 말을 던지고 계획을 짰어. 이름은 뭐로 할까… 그래, 책상화라고 하자. 오피셜하고, 진지하고, 엄한 느낌으로. 그래서 1주일 후에 책상화 그리기 대회를 했는데 작품심사를 위해 전교생 불러서 스티커 붙이게 하고, 그린 사람 이름은 가리고 채점하게 하고, 각 잡고… 그렇게 결정된 결과로 시상했고. 그런데 부작용도 있었지. (모르는 사람인데 연락이 와서) "권나무 선생님 덕분에 저희 반도 해봤어요.“ 했는데 그림을 보니까 다 낙서인거야. 책상화 그리기 대회는 내게는 소묘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수업의 과정이었어. 도화지 대신 책상에 그림을 그리게 한 것뿐이고, 끝나고 나니까 뿌듯함이 있었어. 그런데 그게 SNS에 워낙 퍼지니까 무슨 내가 좌파 교사인 것처럼 ”책상에 낙서를 허하라“ 뭐 이런 게 돼서… 교무회의에서도 그런 비난을 들으니 내가 뭘 말하면 먹히나… 나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야. 책상에 낙서하면 창의력이 올라간다? 그런 거 없어. 대신 나는 수업 전날 지도서 보면서 혹시 내가 가르쳐야되는데 까먹은 거 없나, 공부하는 사람이지. 아이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거야.      


단 _ 그런데 책상화 그리기 대회를 진행하는 방식이, 본인이 본인의 음악을 작업하는 방식과도 비슷해 보이는데? 나무도 작업하면서 본인의 퀄리티와 텐션을 유지해야하고, 동시에 자신이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를 계속 고민해야할 텐데 거기엔 사실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건 아니잖아.     


권 _ 그런데 그것보다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 교사는 중간지대가 없는 직업이야. 음악에는 자신이 의식을 하건 말건, 내가 놓이건 놓던 간에 중간지대가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교사는 깃발을 꽂아야해. 우리가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까 가만있자, 이러면 안 돼. 수학을 못 하면 알려주겠다, 하고선 알려주는 게 교사야.


단 _ 음악에서는?


권 _ 1집에 비하자면 2집에서 깃발을 조금 더 올렸지.     


단 _ 개인적으론 1집 [그림]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정서가 노스탤지어라고 생각되는데.     


권 _ 곡을 지배하는 정서가 분명 있지. 그런데 앨범 전체로서는 그 정서가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어.


단 _ [그림]이란 단어는 조금 딱딱한 질감이야. 그리고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나 형태를 지칭하는 단어지. 그래서 나는 앨범이 라이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데, 라이브는 솔직함이 반영이 된다면 앨범으로 들을 때는 오히려 미묘하게 거리감이라거나, 싸늘함 같은 것이 있더라고.     


권 _ 내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앨범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 [그림]에 실린 곡들은 내가 20대 초반에 만든 노래들이고, 라이브를 할 때는 그때의 기억과 정서, 내 지금의 심리가 같이 쏟아지게 되는데, 앨범은 제목처럼 관조적이지. 내 앨범에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많아. 그런데 앨범을 만들 때는 어쨌건 그로부터 떨어져서 만들게 되지. 그래서 그 앨범의 소개를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듯 각자의 머릿 속에 각자의 기억이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썼어. 들으면서 자신의 어릴 때에 대해 생각했으면 한다는 거야.     


단 _ 나도 요새 음악들을 찾아듣긴 하는데, 요새 한국에서 나오는 포크음악들에선 그 관조미, 거리감 같은 걸 찾기 어렵다고 생각해. 자기자신의 에고ego와 풍경이 너무 가깝거나 그냥 에고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오래된 포크음악들에선 에고와 세계의 시차와 거리감에서 오는 아름다운 같은 게 있거든.     


권 _ 나도 거기에 질린 거야. 나는 한병철(철학자) 씨 좋아하는데 《투명사회》라는 책에서는, 인간들이 공허해지는 이유가 거리의 부재 때문이라고, 거리의 부재 때문에 인간들이 더 외로워진다고 이야기 하더라고. 거리가 생기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남녀가 만나 서로를 알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입증해야하는데 요새는 SNS나 이런 것들도 있고, 너무나 거리가 부재하면 서로가 투명해진다고… 에로스도, 섹슈얼함도. 그러면 시간이 지났을 때, 과연 인간은 무얼 그리워할 수가 있겠냐고. 내가 모든 걸 다 알면 그리울 수가 없잖아.     


단 _ 원래 관계라는 게 근본적으로 거리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거지. 거리가 없으면 관계라는 게 맺어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권 _ 나는 내 자아가 너무 강할 때, 관계에서의 거리가 없는 것이 아름답다 믿었어. 이를테면 여자를 만나면 엄청 집착하고, 내 친구면 나를 다 알아야하고, 애인이면 같이 지내야하고… 거리에 따른 존중감이란 것에 대한 사고를 못하던 놈이었는데 또 사람이 변하더라고. 극단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으로.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1집의 곡들은 이성적이고 공허한 곡들이 많아. “노래가 필요할 때” 같은 노래도 마찬가지야. 내가 그 곡을 만들었을 때는 나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휘둘리는 감정에서 벗어나 아주 자유롭게, 용기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지.     


단 _ 거리감을 가지기로 마음먹는 것도 인간에겐 큰 용기를 내야하는 일이야.     


권 _ 그때는 그런 곡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어.     


단 _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는 서른 살을 지나왔어요. 우리 둘 다. 올해도 나란히 앨범이 나오겠네. 나는 어릴 적부터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 10대 중반쯤부터 록을 들었는데, 내가 꼬마밴드로 시작해 처음 무대에 선 것이 10대 후반 무렵이었고, 당시의 내가 아주 좋아하던 코코어 같은 밴드의 구성원들은 서른이 넘었지. 그런데 그 분들이 서른이 넘으면서 만든 음악들이 정말 근사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막연히 서른 넘으면 뭔가 더 훌륭해지는구나,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그렇진 않더라고. 오히려 더 유치해지기도 하잖아? (웃음) 나무는 어땠어?     


권 _ 안 달라지지. 그 사이에, 어쩌면 평생 다시는 느끼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랑을 하기도 했고. 그 사랑은 이미 끝났지만. 나는 (갓 성인이 되었던 무렵에) 굉장히 감정적인 시기를 지내다가 그게 힘들어서 또 이성적인 사람이 되었는데, 교직생활 시작하고 그 사람을 만나면서 또 완전히 바뀌었어. 사람은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해야해. 하지만 나는 그걸 못하는 놈이었다고. 세상에 중립지대가 없다고 얘기했는데, 사랑에도 중립지대가 없다고.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아. 2집에는 그런 마음들이 더 담겨있어.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아. 권나무를 정말 좋아해줬던 분들이라면 이해해주시겠지만… 더 질척한, 그런 앨범이야. (1집을 냈을 무렵의) 그때 나랑은 또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 물론 완전한 정반대는 아니고, 노래를 부르는 나는 비슷해 보이겠지만 머릿 속의 구상이나 그림은 정반대지.


단 _ 나무 씨가 음악가로서 어떤 사람이 되고싶다, 이런 건 있어?


권 _ 없는데? 멋진 어른으로 살다가 잘 죽어야지. 가르칠 만큼 가르치다 못 하겠다 싶으면 교사도 관두고, 할 이야기가 없으면 음악도 관두어야지. 삶의 목표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만. 내 유일한 소원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아보는 거야. 덧붙여서 출근했는데 아이들도 나를 반겨주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음악도 꾸준히 하면서 홀대 안당하고 손가락질 안당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지.     


단 _ 이 잡지의 주요 독자층은 아마 일을 하는 사람들일 거야. 본인도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줬으면 해.


권 _ 나는 진짜 자기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믿지. 그게 목수든, 교사든. 그걸 직업윤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일의 본질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 중에선 사기꾼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일 잘 하는 사람을 믿어. 나도 일을 잘 하고 싶고. 나는 반작용으로서 일을 하는 게 싫어. 교직의 답답함을 음악이 해소해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연히 해소되지. 하지만 그렇다고만 이야기하면 나는 반작용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돼. 내게는 둘 다 일이고, 나는 잘 하고 싶어. 그래서 누가 나보고 음악 취미로 편하게 하는 거죠? 하면 존나 일이거든요? 하고 답하지. 하지만 일이죠? 라고 하면 사실 취미이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거라 답하기도 하지.     


단 _ 많이들, 감각과 감정을 다루는 일에 대해서는 일이라고 잘 인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


권 _ 정성을 다해 뭔가를 만들고 거기에 대해 책임지면 일이지. 나는 되는대로 하는데? 이러면 일이 아냐. 그렇게 얘기하고 보니 음악은 내게 정말 너무나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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