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의 라이너노트로 쓴 글이다. 본문에서도 나와있듯 원래는 다른 분에게 부탁드리려 했으나 시간여유가 없었다. 유동도 다른 일로 바빠 결국 내가 쓰게 되었다. 《이소》 음원의 음반소개로 플랫폼에 노출할 수 있도록 유통사에 전달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보도자료로 쓴 글이 올라갔다. 글이 음반소개로선 부적절했을까. 수정을 요청드리기 겸연쩍어 대신 브런치에 남긴다. 매우 느리게 연재중인 '프로듀서의 일' 시리즈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역시 겸연쩍지만 시리즈에 편입시키기로 한다.
《이소》를 위한 기록
― 단편선 (음악가, 프로듀서)
작업의 시작은 언제나 곡을 추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싱글 〈디플로도쿠스〉의 작업을 마무리하던 초봄쯤 새로운 EP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떤 음악이 되었으면 해요?
― 《관찰자로서의 숲》과는 달랐으면 해요. 자연이나 숲 같은 이미지로만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서.
원래는 말과 언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곡들을 모아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곡을 골라내는 과정에서 ― 물론 〈디플로도쿠스〉에선 주문처럼 "이제 준비가 됐어"라고 반복해 읊조리지만 ― 그런 테마를 다루는 데는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신 유동이 지금까지 들려준 테마를 한 번 더 선보이기로 했다. 그러나 보다 넓고 푸르게. 그러나 보다 황홀하게.
그러니까, 《이소》는 예정에 없던 음악들이다. 그러나 삶이란 원래부터 예정에 없던 것이기도 하다.
〈은행나무〉는 유동의 오래된 곡이다. 처음 노랫말을 쓴 건 2010년이다. 곡을 붙인 건 더 이후의 일로, 인천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던 때다. 경북 칠곡에서 살다 음악을 매진하겠다며 상경한 유동은 이내 서울의 높은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워 거주지를 인천으로 옮겼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연하며 받는 한 달에 30~40만 원가량의 생활비만으로 어렵게 삶을 꾸려나갔다. 유동의 것 중 가장 간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무당벌레〉, 〈주안〉 같은 곡들이 이 시기에 〈은행나무〉와 함께 쓰였다.
〈숲으로〉는 《제6회 전국 윤동주창작가요제》에 출품하기 위해 쓴 곡이다. 한창 《관찰자로서의 숲》을 작업하던 와중이다. 모아놓은 자금이 넉넉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히 곡을 써 내려갔다. 윤동주의 동시 「반딧불」에 노래를 입혔다.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비를 메꿔나가야 했다. 하지만 좋은 곡이었다. 아낌을 받을 가치가 있는 노래였다. 쓰인 목적에 따르면 이미 실패한 곡이지만 우리는 이 곡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EP의 제목과 동명의 곡인 〈이소〉, 그리고 연주곡 〈배웅〉은 《이소》 EP를 위해 쓰인 곡이다. 유동은 〈이소〉의 노랫말을 쓰는 과정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공개했다. 빼곡히 아이디어가 적힌 수첩을 놓고 자기 팬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처음 유동이 〈이소〉를 연주했을 때, 나는 제프 버클리Jeff Buckley의 어떤 록 음악들이 떠올랐다. 원래는 포크기타 한 대로 사이키델릭한 리프를 연주하며 전개되던 노래였다.
본격적으로 레코딩을 위한 리허설에 들어간 건 여름이었다. 《관찰자로서의 숲》을 함께 만든 다진, 현우, 재준, 파제가 새로운 EP에도 그대로 참여했다. 《관찰자로서의 숲》을 만들 때, 우리는 처음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소》를 만들 때의 우리는 이미 1년 반을 함께 해온 팀이었다. 구식임을 인정하지만, 좋은 사운드를 만드는 기본은 섬세하고 충분한 연주를 끌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큰 줄기 속에서 연주자가 자유롭게 뜻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번은 현우가 말했다. "형은 연주자의 제안을 잘 들어주어서 좋아요." 내게는 가장 큰 칭찬같이 느껴졌다.
경건하고 보드라운 포크송이었던 〈은행나무〉에 댄서블한 비트를 매칭하고 겹겹이 두른 소리로 장엄한 서사를 펼쳐보았다. 역시 포크송이었던 〈숲으로〉에선 동양적인 색감과 재지한 터치를 함께 덧입혔다. 〈이소〉는 오히려 한껏 비워냈다. 청자들이 이야기에 담뿍 빠져들었으면 했다. 낭만적이지만 쓸쓸한 〈배웅〉은 레코딩부터 믹싱까지, 온전히 전유동의 실력이다. 먼 길을 가는 이를 배웅하는 마음을 담아. 〈숲으로〉와 〈이소〉의 브릿지 역할을 하는 이 곡은 〈이소〉의 프리퀄인 양, 자연스럽게 서사를 잇는다.
유동의 목소리를 표현하는데도 전보다 공들였다. 《관찰자로서의 숲》의 작업이 종료된 다음, 이를 복기하면서 문득 유동의 목소리가 수채화 같다 느낀 적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목소리. 때로는 맑게, 때로는 짙게. 수채화 같은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썼다.
여름부터 이어진 작업은 추워져 패딩을 꺼내입을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예상보다 너무 길게 이어진 작업에 유동과 나는 서로에게 종종 물었다.
― 혹시 우리 게을렀나?
― 아뇨. 분명 열심히 했는데…
― 그러게! 열심히 했는데!
한날한시에 발표하기로 한 악보집의 일정을 조금 늦췄다. 악보집은커녕, 음악 작업도 발매가 일주일쯤 남았을 때야 끝나는 매우 빠듯한 일정이다. 전유동이 직접 작성하고자 했던 라이너노트도 악보집 원고가 급해 내가 쓰게 되었다. 일정 관리의 책임이 있는 프로듀서로서 많은 동료에게 폐를 끼쳤다. 지면을 빌어 송구함을 전한다. 그래도, 어제는 그런 얘기를 했다. 자정이 넘어, 마지막 믹싱을 마무리 짓고서, 오랜 시간 함께 한 엔지니어 학주에게.
― 얼마 전에, 진짜 오랜만에 《관찰자로서의 숲》을 듣는데, 유동도, 나도, 우리 연주도 많이 달라졌고, 학주 믹싱하는 것도 많이 달라졌더라고. 1년 반밖에 안 지났는데.
― 나는 원래 계속 달라져. (올해 들여온 하드웨어 장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리고 저걸 샀잖아.
― 아… 장비빨이구나.
― 장비가 달라지면 할 수 있는 게 다르니까 당연히 달라지기 마련이지. 아무튼 유동맨 이걸로 아주 2021년을 강타하겠구먼.
강타한다는 게, 잘 된다는 게 이제는 뭔지 정말로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주 말대로 다 되었으면 좋겠다.
2021.10.24.
마지막 믹싱을 마친 다음 날 오후 합정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