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이 모든 여정의 시작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낯선 곳에서의 첫날이라기엔 이상할 만큼, 괜히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버텨온 적응력, 그리고 근거 없는 긍정. 그 두 가지만으로도 어쩐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한류가 유행이라는데, 다들 잘해주지 않을까. 어쩌면 나 한국인이라 인기도 좀 있을지 몰라.'
두려움 섞인 설렘에 난데없는 자신감까지 얹어 학교 정문을 지난다.
2015년 가을, 아버지의 주재원 파견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왔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온 나는, 사라토가라는 작은 도시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 10학년으로 입학했다.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가능하다면 학년을 낮추고 싶었지만,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준비된 상태’가 아닌 채로, 교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사실 나는 오래도록 야구만 하며 살아온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동네 리틀야구팀에서 시작해 전학까지 다니며 운동장을 옮겨 다녔다. 수업보다 경기가 먼저였고, 교실보다 더 익숙한 곳은 늘 운동장이었다. 그나마 야구를 시작하며 아버지와 했던 약속 덕분에, 없는 시간을 쪼개 어떻게든 진도를 따라가려 애썼지만, 물리적으로 부족한 시간 앞에서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사실, 나에게는 야구밖에 없었다.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선수도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내 야구는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믿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던 나였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 이국적인 옷차림과 낯선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신기한 듯 나를 향하는 시선, 먼저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는 표정들이 내 주변을 가득 매웠다. 그렇게 누군가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하면, 내 대답은 한결같이
"Hello, my name is Daniel, and I'm from Korea."
가 전부였다. 그들의 말은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고, 막막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막 타석에 들어섰는데, 이미 삼진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채 넘겨보던 수업 자료, 혼자 앉아 있던 그룹 활동 시간,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하루. 집에 돌아와 숙제를 펼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답을 적어나갔다. 맞고 틀림보다 중요한 건, 내일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만큼 오늘을 버텨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점점 말이 통하는 사람들 곁에만 머물렀다. 그곳에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었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는 더 멀리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학교 야구 시즌이 시작되는 봄을 기다리며, 어쩌면 그땐 이 어둠이 끝이 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캘리포니아의 따스한 가을을 유난히 차갑게 보내던 열다섯 살의 나였다.
현재의 나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거주하며 경영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클라이언트의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제안하는 직업이다. 2015년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모습이다. 한때는 2026년의 내가 내 최애구단인 기아 타이거즈 중견수로 뛰고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데려왔다.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시간은 특별한 성공의 연속이기보다, 포기하지 않고 서 있었던 순간들의 합에 가까웠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계획대로 되는 일 하나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다시 시작했던 날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잘해낸 사람의 기록이 아니라, 서툰 채로 버텨온 사람의 기록으로.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막막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어서. 기아 타이거즈의 주전 중견수는 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목표와 열정을 품고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첫걸음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서.
난데없는 자신감을 안고 학교 정문을 넘던 2015년의 내가, 시카고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오늘까지. 이 여정이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라며,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위로와 응원 삼아, 가볍게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나의 첫 브런치를 게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