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산책

by 단정

봄의 산책



1. 호수


이른 새벽의 찬기운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둥그런 달빛과 새하얀 별빛을 따라 움직입니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얼얼하고 손등이 부르틀 만큼 매서운 날씨라 해도 호수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대의 언 얼굴을 바라보는 듯한 심경으로 내내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2. 당진

기어코 서해대교를 보겠다는 심경에 다다른 섬

기다랗고 높은 굴뚝들에서 연기가 계속 퍼지는 걸 보았습니다

바다를 보여주던 당신의 그림자를 또 생각했습니다



3. 한밭


고매한 정자 옆 한적한 호수를 거닐다 보면

때때금 안부를 궁금해 한 사람도 있었나 봅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 때면 점점 나이가 드는가 봅니다



4. 추동


어스름한 새벽을 기어코 뚫어낸 대청호의 아침은

붉디붉은 햇살로 온통 호수를 감싸 안은 채 적막함 뿐이고

저만치서 손짓을 하는 그녀도 어쩌면 볼 수 있었겠습니다



5. 보문

'사정공원' 연작을 16번까지 쓴 기억도 납니다

더는 쓰지 않는 연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차례였나 봅니다

폐허가 다 된 운동장에서 골을 넣던 기억도 났습니다



6. 광양

지리산을 덮은 설경도 제친 발걸음이 이윽고 닿는 곳

백매화와 홍매화가 한데 어우러진 비탈길에서

잠시 또 그대를 생각하였나 봅니다


아무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어머니 말씀처럼 이토록 아름다운 정경이

어쩌면 그대의 눈빛과도 닮아서 그랬을 겁니다



7. 구례

가장 살고픈 고향이 어쩌면 이곳이었을까

혼잣말로 중얼대는 아침은 내내 조용하기만 하고

제 홀로 꽃을 피운 나무 한 그루만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8. 여수

이미 저물어 버린 동백의 꽃그늘 아래

세찬 바닷바람에도 묵묵히 앉아 제 눈을 기다렸나 봅니다

먼발치 망망대해에서도 내내 꽃내음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9. 순천


저물면서 빛난 바다를 한눈에

굽이쳐 흐른 강줄기를 화폭처럼 담아내

더는 못 볼 이곳에서도 당신을 기억했습니다



10. 화엄

홍매화 한 그루 필 때쯤이면

그리움마저도 뒷산의 벚꽃 그늘로 질 텐데

미처 피지도 못한 마음이 불당 앞에 머물고...



11. 대구


김광석 노래를 듣는 오후

한 번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처럼

한 번 제대로 고백을 하지도 못한 먹먹함처럼



12. 옥천

광양을 구례를 닮아서 옥천

정지용의 고향인데 호수의 마음은 매한가지

허연의 시를 조우한 박물관에서 또다시 아침



13. 단양

웅장하기만 한 사인암 앞에서

도도하게만 흐르는 남한강 줄기를 바라보다

문득 지키지 못한 한 약속을 생각해 냈습니다


14. 숯골

꿩 대신 닭이라며

평양만두 한 접시와 냉면 한 그릇을 먹고

돌아가신 아버지랑 함께 먹던 그날을 기억했습니다



15. 대덕

봄꽃이 아직 이른 카이스트 교정을 거닐다

한 줄기 휙 바람이 불었고, 나도, 너도, ...

한참 공부하던 시절의 그때를 추억했습니다



16. 평촌

문득 생각이 난 사람이 있어
고속도로를 단숨에 나와 닿았던 공원에서

갑자기 해물탕 생각이 난 건 또 뭐였지 싶어




# 단정,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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