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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Nov 11. 2023

한평생 인생의 정답을 찾아헤맨 노인의 질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후기 :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철학

스포 없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평.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발견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러 간 시점에는 고작 개봉한 지 3일 차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평점이 굉장히 박살이 나있어서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는 사실 거짓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인데, 지브리인데! 어떻게 기대를 안 할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 나는 오래간만에 정말 잘 만든 작품을 본 기분이 들었으며, 보는 내내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다. 하는 감탄이 나왔다.


그런데 평점은 왜 박살이 난 것인가?

그 이유는 영화를 보다 보니 곧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한국인에게는 평점이 1점이거나 10점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시대적 배경 (1930년)

한국인에게 충분히 반감을 살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다.


2.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관계성

도덕적으로, 아니 인간이라면 이럴 수가 있나 싶은 관계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내용상 그 시절에 대한 미화가 크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내용 또한 현대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불편할 수 있으나 그때 당시 일본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3.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철학이 가득 담긴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

위의 두 가지 이유를 제치고라도 평점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당연히 이 부분이다. 1점짜리 리뷰의 대부분이 지루하다. 난해하다. 시간 아깝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라는 내용이었고, 심지어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노망 난 할아버지 취급하는 리뷰까지 있었다.


그 이유는 이번 영화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던 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3-1) 앞부분은 살짝 루즈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로 길었는데, 그에 비해 조금은 허무한 결말.

오히려 나는 이 결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었던 점과 나의 인생철학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줘서 만족스러웠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지루하고 난해하게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 그동안의 지브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이 작품은 그동안 지브리의 작품들에서 느껴졌던 꿈과 환상의 나라 같은 이미지가 아닌, 현실적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면서도,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세계관으로 관객 입장에서는 상당히 심오하고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철학적인 내용을 잔뜩 담아냈다. 그렇게 본인의 인생철학이 담긴 내용들을 가득 쏟아낸 영화가 끝난 후, 제목과 함께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들은 평소에 그렇게 한가하게 철학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가만히 앉아 현실적인 문제들도 아니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따위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봤으면 그 영화에서 감동받기 또는 교훈 얻기. 그게 아니면 하다못해 재미라도 얻기. 가 되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관객들을 잔뜩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되려 질문을 던지며 더 깊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없는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정말 이해 안 되고 난해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임이 확실했다.


나는 한량처럼 가만히 앉아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일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내 만족스러웠다. 이러한 점에서 나에게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빼고 봐도 너무나도 완벽한 작품이었다.


아니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작품들 중에서는, ‘지브리니까.’ ‘미야자키 하야오니까.’ 하며 실제로 느낀 감동보다 조금은 고평가 하게 되었던 작품들이 몇몇 있는데,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타이틀 없이도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싶은 영화였다. 시간만 된다면 영화관에서 다시 한번 관람하고 싶을 만큼.


이리저리 찾아보다 알아낸 의외의 사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 하나.

이 영화는 영미권에서는 평점이 10점 만점에 8점이 넘을 정도로 평이 좋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5~6점대. (물론 한국에서도 평론가 평점은 높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한국인들과, 어느 정도 인생을 철학적으로 돌아볼 여유가 있는 서양권 사람들의 차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과 별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만의 섬세한 작화와 지브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상미. 그리고 지브리 하면 빠질 수 없는 OST. 이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가 아닐까. 심지어 이번 작품은 7년이라는 긴 제작 기간에 더불어 지브리 역사상 최대 제작비를 투입해 만들었을 정도로 상당히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관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인생 영화를 발견하면,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영화관에서’ 봤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받는다.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며 나는, 매번 보던 작은 아이패드 화면 속이 아닌,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으로 토토로가 그려진 스튜디오 지브리의 파란 화면을 마주했을 때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다니.

지브리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이고 운명이다.


이것은 ‘천재적인 감독과 동시대에 살고 있어야 가능한 일’ 임과 동시에, ‘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 나’라는 엄청난 두 가지의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져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니까.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작품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떤 생각으로 이번 작품을 내놓았을까.


그동안의 지브리 작품들은 꿈과 현실 사이에 있으면서도, 꿈속에 조금 더 머무르게 해주는 방식으로 여운을 한가득 남겨줬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꿈보다는 현실 쪽에 훨씬 가까운 곳에다가 나를 데려다 놓고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생각거리를 잔뜩 남겨주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지브리가 동심 그 자체였다면, 이번 작품은 인생을 통달한 노인의 머릿속 그 자체.


심지어 평생을 깊은 고뇌가 요구되는 창작활동을 하며 살아온 자의 머릿속인데, 그보다 고뇌의 시간도, 살아온 인생의 시간도 훨씬 짧았던 우리가 그 모든 게 담겨있는 이번 작품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이 영화는 내용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난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생각했어. 너는 어떻게 살 거야?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질문이니까.


매번 나를 꿈속에 영원히 살고 싶게 만들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번에는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생각해 보았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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