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보자면 솔직히 졸리는 책이다. 다 좋은 얘기만 있다. 조금 읽다 보면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기 때문이다.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성경은 역사적 스토리라도 있는데 논어는 스토리 전개도 없는 문답서다. 앞뒤 맥락을 모르고, 인물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간 직간접적으로 논어를 알고 있다. 논어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거의 없다. 주워들은 얘기들, 공자가 말한 좋은 문구들을 외우고 인용할 뿐이다. 논어 읽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보니 그냥 우리 관점으로 우리 시선으로 해석해 읽게 된다. 그러니 내 생각에 너무 당연한 얘기 거나 이해 안 가는 문구는 대충 넘기게 된다. ‘부모님께 효도해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뭐 달리 해석할만한 건더기가 없다. 결국 내 처지나 경험에 맞춰 와 닿는 얘기들만 밑줄 그어놓고 저장했다 활용하고 있다. 논어를 잠언이나 처세서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세서 읽고 사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얘기도 실천이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체험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성이나 응용력이 떨어진다.
논어는 솔직히 부정적 이미지도 만만치 않다. 예절에 치우치고, 제사에 집중하고, 원칙적이며, 교조주의적 이미지가 크기 때문이다. 제발 ‘공자 타령하지 말라는 ‘ 비아냥거리는 말까지 속담화될 정도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역사에 있어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유학자들 간의 소모적 논쟁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갖고 있다. 지금 의회민주주의의 양당제를 조선시대 사림 간 당쟁의 연장으로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논어가 경전이 되고, 공자는 세계 4대 성인으로 거론된다. 미국 대법원 건물 벽에 18명의 철학자(법학자)가 새겨진 동상에 ‘공자’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제 논어를 제대로 읽어야 할 시대가 왔다. 이유는 단 하나 뉴 노멀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100년의 세기(Century)라는 세기가 바뀌고, 1000년의 밀레니엄이 바뀌고, 2000년의 듀오 밀레니엄이 한꺼번에 바뀌는 시대다. 이에 따라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며, 기후도 변화하고 있으며, 세계화도 멈추며, 전쟁과 팬데믹이 이 시대에 위기감을 주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는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리셋된다. 리셋된 사회는 새로운 포맷이 필요하다. 새로운 포맷을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보니 여기에 맞는 새로운 철학적 기준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공자 철학을 고민하고, 논어를 제대로 읽어야 되는 이유다.
인류가 지난 2000년을 지내온 ‘지식사회(역사시대)’ 동안에 논어는 아쉽지만 처세서로 남아 있어도 될 정도로 학문이 세분화되고, 새로운 철학이 필요 없는 시대였다. 굳이 “공자왈~”하지 않아도 사회적 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기에 새로운 철학의 필요보다는 처세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눈으로 논어를 보지 말고 가슴으로 논어를 봐야 한다. 가슴으로 공자를 본다는 것은 공자의 눈으로 공자의 프레임으로 논어를 다시 보는 것이다. 한자 하나하나의 의미에 매몰되지 않고 공자가 설계한 인류사적 메커니즘을 봐야 한다. 그러면 왜 공자가 2500년간 그렇게 유명한 인류의 4대 성인이 되고, 미국 대법원 건물에 조각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만, 논어의 구성은 한자로 함축되어 있고, 알 수 없는 구조로 편집되어 있다. 이 비밀을 풀어야 21세기, 새로운 3000년을 예측할 수 있다. 반려견과의 놀이 중에 노즈 워크 놀이가 있다. 간식을 다양한 곳에 숨겨놓음으로써 반려견 스스로가 사냥에 대한 성취감을 높일 수 있고, 후각의 감각을 높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놀이 겸 훈련이다.
논어의 이름 모를 편집자는 이 노즈 워크 놀이에 매우 충실하게 논어를 편집해놓는다. 보상이 필요 없던 지난 2000여 년간 우리는 논어가 숨겨 놓은 숨은 비밀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 공자가 4대 성인 인지도 매우 긍정적이게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인류는 감각이 무뎌진다. 역사시대 후반기에 학문들은 세분화되었을지언정 창조성이 결여되었다. 물리학에서부터 수학, 철학,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노즈 워크 놀이를 멈춘 덕분에 새로움이 없다. 2000년 전 철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노멀에 만족하고 이를 넘으려는 노력에는 게을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논어 학자는 있어도 공자를 넘는 동양철학자가 탄생하지 못하는 이유다. 오죽했으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이제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인류사회의 기준을 설계하기 위한 논어 읽기에 몇 가지 기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한자 해석이다. 공자의 눈으로 논어 읽기에서는 논어 속에 사용되고 있는 한자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논어가 남긴 한자(漢子) 몇 글자에 갇혀버리면 논어 여행은 또 실패하게 된다. 내가 임의로 깨닫고 해석한 내용을 타자에게 가르치고 강요함으로써 교리가 생기고 논쟁에 의한 갈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어에 접근하면 여행지에 갔다 좋은 풍경 몇 개 사진 찍고 돌아오게 되는 것과 같다.
물론 한자를 모르고, 심지어 우리는 2000년간 강력한 세뇌를 당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당에서도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어 특정 층만 읽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성경을 각자 임의 해석하는 행위를 경계하기 위함이 크다. 논어도 그 해석을 감히 함부로 못하게 만들어 놨다. 자칫 유명한 논어학자 마저도 이단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엄청난 공격을 당할 수 있어 2500년간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철학적 발전 없이 남의 해석을 외우는 데만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결국 내 옷이 아닌 남의 옷을 걸치게 된 이유다.
둘째, 논어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다. 2500년 전 공자는 논어에 비밀의 수수께끼를 숨겨 놓는다.
자신은 분명 이 답을 깨닫고 알고 있었지만 대 놓고 학술논문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는 시작과 끝은 명확히 내놓습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것은 학(學)과 습(習)이며, 인간이 지향해야 할 것은 ‘인(仁)’이라고 선포한다. 결국 시작과 끝이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어떻게(How to?) 이룰 것인가라는 가이드북이 바로 논어다. 사람이 이 인(仁)을 완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풀어놓는 책인데 더 쉽게 표현하자면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논어의 편집자는 거기에 가장 핵심적인 수수께끼를 숨겨 놓는다.
자신의 지식(Text, 語)을 사람이 지혜(Hypertext, 論)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 즉, 알고리즘을 책 속에 숨겨놓은 것이다. 이는 각자 생각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깨달음이나 환경이 다르기에 자기 생각(語)을 논(論)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령교수는 이를 '지성에서 영성으로'라고 표현하고 있다.
논어에서는 내 생각(語)과 남의 생각(語)이 서로 부딪혀 담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값(Hypertext)을 만들어 가는 알고리즘에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킨다. 바로 예(禮)다. 덕(德) 있는 자기 생각을 갖추고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타자에 대하여 예(禮)를 다해 의(義)를 이루려고 노력하면 仁하게 된다는 것이 공자가 주장하는 논어의 기본 알고리즘이다.
논어를 조금만 읽다 보면 쉽게 이 알고리즘을 볼 수 있다. 물론 해석자에 따라 한자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한자(漢字)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보다는 공자가 어(語)를 논(論)으로 바꾸는데 우리 인간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적어 놓은 비밀을 파헤치면서 보상을 받는다면 논어의 저자가 만들어 놓은 노즈 워크 놀이에 최고의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박항준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이사장
누림경제발전연구원 원장
디케이닥터 대표이사
저서: △더마켓TheMarket △스타트업 패러독스 △크립토경제의 미래 △좌충우돌 청년창업 △블록체인 디파이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