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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준 칼럼] 인지감수성이란 결국 격벽을 세우는 일

by 박항준 Danniel Park
선박의 일괄 침수와 침몰을 막아주는 격벽의 이미지

선박이나 항공기, 차량에서의 격벽(bulkhead)은 구조적·안전적 장치다. 사고가 발생해도 피해를 한 구획에 국한시키고 전체의 침몰을 막는 것이 격벽의 역할이다. 수밀 격벽은 침수를 차단하고, 내화 격벽은 불길을 막으며, 압력 격벽은 진동과 충격을 분리한다.

인지감수성 역시 이와 같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판단에서 불필요한 감정의 침수, 오해의 화염, 편견의 충돌을 막아주는 심리적 격벽이 바로 인지감수성이다. 격벽이 없는 사회는 작은 충돌에도 쉽게 무너진다. 불완전한 정보가 감정적으로 증폭되고, 오해와 편견이 정제되지 않은 채 번지면서 전체 구조를 뒤흔든다. 인지감수성이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 타인을 판단하거나 사회적 사건을 해석할 때, 나와 대상 사이에 감정적·도덕적 경계를 세우고 그 경계 안에서 담론을 분리해내는 능력, 이것이 인지감수성의 핵심이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사생활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국민이 하야를 요구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미국민은 ‘대통령이라는 공적 역할’과 ‘개인의 사생활’을 구분하는 격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 일탈은 비판하되, 그것이 공적 수행의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집단적 인지감수성이 미국 사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격벽이 미국 정치 시스템 전체의 침몰을 막아낸 셈이다.


반면 최근 한국에서는 마약 조사를 받던 연예인이 불륜이 드러나자, 여론의 집중 폭격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잘못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사적 윤리와 직업적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한 번에 뒤섞어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는 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공동체의 단면이다. 격벽이 없는 배는 충격 한 번에도 침몰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의 파편 하나가 전체를 흔들고, 구조적 판단은 자리를 잃는다. 인지감수성은 바로 이 감정적 침몰을 막아주는 사회적 안전 시스템이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격벽, 환경운동가는 환경운동가로서의 격벽이 필요하다. 격벽은 책임 회피를 위한 방패가 아니라 역할과 영역을 명확히 나누어 사회의 균형을 지키는 장치다. 그 사람의 인간성, 자녀의 군대 문제, 부동산 투기, 대학 진학, 학폭 등 사적 요소를 공적 판단의 기준에 뒤섞어버리면, 사회는 한 번에 요동치고 결국 모두가 침몰할 수 있다. 비판은 필요하되, 그 비판이 향해야 할 구조적 맥락과 도덕적 프레임을 구분하는 격벽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미국에서 고위 공무원 청문회를 공개·비공개로 나누는 이유도 정확히 이 때문이다.

인지감수성이란 결국 ‘판단의 격벽’을 세우는 지혜다. 그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균형 감각이며, 무감각이 아니라 구조적 사고다. 격벽이 없는 배는 작은 충격에도 침몰하지만, 격벽이 세워진 배는 일부 손상이 있어도 끝까지 항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의 승객은 바로 우리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적 후폭풍, 인공지능의 등장, 국제질서의 재편이라는 거센 변동 속에 놓여 있다. 이 격변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인지에서부터 사회적 약자, 생명, 인종, 성별, 환경,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다름·다양성·다채로움을 수용하는 인지감수성의 격벽이다. 이 격벽이 약할수록 사회는 전체주의·집단주의·파편적 분노로 기울고, 강할수록 문명은 견고해진다.

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대한민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면 과학기술부 장관이 될 수 있어야 하고, 20년 전 음주운전 전력이 있더라도 현재의 능력과 공적 자격이 분리되어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격벽의 힘이며, 인지감수성이 설계하는 문명성장의 기준이다.

우리 사회가 인지감수성이라는 격벽을 세우고, 그 격벽 속에서 담론을 실천한다면, 다가올 어떠한 거대한 폭풍에도 대한민국호는 더 멀리 항해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박항준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누림경제발전연구원장
펫누림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디케이닥터 대표이사
기술거래사/기업기술가치평가사
공)저서. 더마켓TheMarket / 스타트업 패러독스 / 크립토경제의 미래/좌충우돌 청년창업 / 블록체인 디파이혁명 / CEO의 인생서재/ 이노비즈 CEO독서클럽 선정도서 21選 (사회관 편)ㆍ (세계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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