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호주에서 K리그 경기 챙겨보는 법
경기 시간이 다가온다. 네*버 축구를 누르고 나의 팀 경기를 클릭한다. '중계'라는 두 글자를 누르면 나의 상상 중계가 시작된다.
*쿠팡플레이는 해외 중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73' 팀명 - OOO 슈팅
*72' 팀명 - OOO 파울
1분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10글자도 안 되는 한 줄을 보며 경기 내용을 확인한다. 머릿속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음성 지원을 들으며 보이지도 않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아, 이 선수가 슈팅을 때렸는데 골이 안 들어갔나 보네.' '아니, 이 선수는 왜 또 파울을 했대?'. 교체 문구를 보면 '부상당했나? 왜 이렇게 일찍 교체 됐지?'라고 혼자 경기 흐름을 상상해 본다.
그러다 Goal!이 뜨면 "꺅!" 하고 소리를 지르려다 혼자 사는 집이 아니기에 입을 막고 참는다. 매우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손에 꼽는다. 하하. 승리가 간절한 꼴찌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런 일을 벌인 지도 3개월 차가 되었다. 'OO를 글로 배웠어요.'처럼 축구를 글로 보고 있다.
경기가 끝난 후 1시간 정도가 지나면 올라오는 2분 하이라이트를 보며 복기한다. 그리고 잠에 들려고 할 즈음 올라오는 전체 하이라이트를 한 번 더 챙겨 본다. 물론 이 과정은 우리가 이겼을 때 필수로 챙기고 졌을 때는 건너뛴다.
가끔 같은 팀을 좋아하는 친구가 고맙게도 카톡 생중계를 해주기도 한다. 이때는 해설위원과 1대1 소통도 가능해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한 줄을 보고 난 후 친구에게 묻는다. "골 어떻게 넣은 거야?", "누가 어시스트했어?", "프리킥으로 바로 넣었어?" 등.
약간의 시차는 있어도, "아~ 이 선수가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만들었어요."와 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해설은 아니어도 몇 분 안에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왜 이렇게까지 챙겨보니?
라고 한다면... 이건 사랑을 빙자한 중독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오랜 중독에 걸린 팬이니까.
세상엔 수많은 덕후들이 있다. 난 수원삼성블루윙즈 축구팀 덕후다. 덕질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때론 부끄럽기도 하고, 때론 나를 어떤 프레임에 씌울까 싶어 걱정이 들기도 한다.(훌리건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공개해 본다.
언제였을까. 질풍노도의 중2 시절, 무난하고 건전하게 사춘기를 보낼 수 있게 했던 존재가 바로 수원이었다. 그 시작은 잘생긴 김남일 선수를 좋아하면서였다. 어쩌다 그랬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수원 사람인데 수원 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니 옳다구나! 하고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로 달려갔다.
기대했던 김남일 선수는 정말 엄지 손가락만 하게 보였다. 얼굴은 당연히 보일 리가 없을 터. 그러나 그날만큼은 잊지 못할 충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다고?
이건 해리포터의 퀴디치 경기장일까. 붉은색이 아닌 파란색을 입고 응원하는 국가대표 경기일까. 선수 소개 멘트에 따라 굵직한 목소리로 선수 이름을 외치는 그들의 함성은 충격적일 정도로 멋있었다. 나의 눈은 선수를 찾기보단 응원하는 모습을 열심히 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소심하고 조용한 중학생은 응원하고 소리 지르며 건강하게 자랐다. 소중한 꿈도 품고서 말이다. 그렇게 햇수로는 손가락 10개로는 셈이 어려운 곧 20년을 향해가고 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오롯이 같은 온도로 좋아하진 않았다. 휴덕기와 잠시의 탈덕기를 포함해 잔잔하게 또는 무관심에 가깝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무려 꼴찌인데 작년엔 뒤에서 세 번째였다. K리그의 1부 리그는 뒤에서 세 번째, 두 번째 팀은 2부 리그의 앞에서 2등, 3등과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매해 조금씩 규정이 변경되어 올해는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지는 팀은 2부 리그로 강등이 된다. 수원은 작년에 처음 승강 PO를 치렀다. 연장전 경기 종료 3초 전에 터진 오현규 선수의 골로 승리하며 말 그대로 기사회생을 했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처럼 다시 팀을 좋아하게 됐다. 극적인 전개, 결말을 좋아하듯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 이 팀의 스토리를 보며 더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호주에 오며 직관은 불가한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상상 축구까지 챙겨보고 있다.
영어를 잘하자고 마음먹은 이유는
축구다. 앞서 말한 소중한 꿈의 주인공이 바로 축구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를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물론 어린 시절에도 신체 능력은 안 됐기에 미련도 없다.
선수 빼고 축구로 꿔볼 수 있는 꿈들은 다 꾸었다. 월드컵에서 억울한 판정으로 졌을 땐 잠시 정의로운 축구 심판이 되는 것을 꿈꿨다. (아주 짧은 기간). 스포츠 마케터, 스포츠 행정가, 구단 프런트, 기자 심지어 축구 에이전트까지. 가장 현실성이 높은 행정가가 되기 위해 대학교 시절에 했던 활동은 조금 과장을 덧붙여 몇 십 개가 된다.
첫 직장은 다른 종목 프로리그 연맹이었다. 너무나 보수적이고 비도덕한 일이 일어나는 그곳이 모든 스포츠를 대변할 거라 생각했다. 진절머리를 내며 '스포츠는 다 이럴 거야.'라는 생각으로 축구산업에서 일하고자 했던 마음을 딱 잘랐다. 그렇게 팀도 잠시 잊는 휴덕기를 보냈던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른다. 몰라도 한참 모르지. 한번 덕후인 사람이 어떻게 영영 덕질 탈출을 하겠는가. 그렇게 지난해부터 다시 불타올랐다.
프로덕트 오너로 받는 스트레스도 유니폼을 챙겨입고 큰 소리로 응원하는 경기장에서 풀었다. 인생의 행복이 곧 축구였다. 강등을 당할 뻔해도 고난을 겪는 모습이 곧 나 같아서 더 좋았다. 퇴사를 결심할 때도 또 다른 미래를 그리는 데도. 결국 다시 축구였다.
그래서 영어였다.
축구 팀을 응원하는 것만큼이나 그 산업에서 일하고자 했던 마음은 늘 컸다. 이렇고 저렇고 해서 꾸겨 넣어 놓은 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펼쳐보았다. 또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영어였다. 객관적으로 가장 필요한 첫 스텝은 영어였다. 축구 산업에서 영어는 필수 중에 필수다. 커리어를 스타트업으로 옮기고 나서 마케터, 프로덕트 오너로 일했다. 영어는 선택인 회사들이었기에 원래도 낮았던 영어 실력은 더 낮아진 후였다.
이젠 어디를 가더라도 넓은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일하려면 영어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 여겼다. 더 늦기 전에, 더 후회하기 전에 잡기로 했다. 영어가 둘러싸인 환경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멜버른에 있다.
어떻게 될진 몰라도
지금 멜버른은 전 세계 워홀러들이 모여 집과 잡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다.(오버를 하자면). 그중 일자리를 구하는 건 정말 어렵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도전해 보려고 한다. 축구로 가고자 하는 시작점을 여기로 찍는다. 되든 안 되든 스포츠 관련 일을 꼭 하나는 해보고 돌아가려 한다.
멜버른 카페 투어에 빠져 잠시 잊고 있던 간절함을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끄적여본다. 지켜봐 달라. 어떻게 되는지. 하하. 이곳에서 나만의 중계를 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