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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형선 daniel Sep 30. 2023

외면과 분노로 조작된 삶으로부터의 해방

어느 독일인의 삶 서평

어느 독일인의 삶(Ein Deutsches Leben) 브룬힐데 폼젤 지음.. 토레 D. 한젠 엮음.. 박종대 옮김.  2018. 열린 책들)



외면과 분노로  조작된 권력으로부터 조직된 민중의 참여로.

20여 년 전 도쿄 시내 한복판 신주쿠 역 게이트 앞에서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범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거창한 주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발단은 아내의 일본인 지인들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지인 중 누구누구는 한국인에게 호의적이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에 어떤 이유에선지 내가 비판적으로 대응한 까닭이었다. 일본이 일본 제국주의 범죄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것에는 일본 시민들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나의 주장이 싸움의 발단이 된 것이다. 나의 생각은 이랬다. 일본 제국주의의 책임을 그 당시 지배자들의 탓으로만 돌리면 앞으로의 역사에서 그런 지배자가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가. 결국은 국가 권력은 국민들이 지지하고 도의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인데 왜 국가의 범죄로부터 국민들은 책임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쁜 권력, 나쁜 권력자에 대한 단죄가 전부가 아니라 그 권력을 지지하거나 용인한 국민들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주장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모든 국민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모두 전범처럼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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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범죄를 잉태한 권력관계를 발견해내는 것은 과도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브룬힐데 폼젤의 회고와 분석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외면과 분노이다. 브룬힐데 폼젤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나치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괴벨스의 비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그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권력자에 합류했고 그것을 위해 그가 볼 수 있는 현실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외면의 알리바이로 스스로의 동조를 합리화했다.
한편으로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의 피폐한 삶에 대다수 독일 민중들은 그들의 희망으로 히틀러를 선택했다. 분노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을 찾게 만든다. 그 단순한 해결 방법은 조작된 선동이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하는 수단이다. 말 그대로 어느 순간부터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단순한 해결책에 의지하는 경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익 포퓰리즘은 더욱 큰 힘을 갖게 될 것이고 그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 악몽이 시작된다.
전후 세계는 2개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구상되었다. 바로 파시즘이 하나이고,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그 하나이다.
스탈린식 사회주의는 파시즘 못지않은 공포정치, 전체주의 정치로 평가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냉전이라는 장벽을 통해 확산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인접해있는 국가들에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개입을 통해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대부분의 체제 영역이 유지되었다. 베트남의 경우를 제외하고. 서구에 복지국가 모델이 정착되고 노동과 자본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균형을 이룬 근저에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존재, 즉 사회주의 확산에 대한 경계도 존재한다.
파시즘의 재등장을 막기 위한 노력은 바로 ‘브룬힐데 품젤’처럼 사회와 정치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한 맹목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상을 경계하는 데 있다. 책을 기획하고 옮긴 토레 E 한젠은 최근 독일을 포함한 유럽 사회 전역에 걸쳐 준동하고 있는 우익 파퓰리즘을 경계한다. 아랍의 이민자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가 우익 파퓰리스트들에 의해 과하게 과장되어 확산되고 있고, 점차 우익 포퓰리즘의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미국에서 도널트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한다. 미국 민중들도 기성 정치 세력의 무능과 배신, 그로 인한 생존의 위협에 따른 분노가  외국인 이민자들에게 표출됨으로써 자연스레 트럼프의 승리로 귀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 서구인들이 경험하고 느꼈던 분노와 무력감과 더불어 경제 파탄의 고통이 파시즘이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과 유럽 세계 또한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 위기와 복지 축소로 점차 빈곤해지고 있는 민중들의 팍팍한 삶과 함께, 이민자에 대한  분노가 확산되어가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하고 엄청난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과 파시즘의 준동을 경계한 계급 타협은 일찍이 소련의 붕괴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로 깨졌고, 냉전 질서를 통해 균형을 이루던 국제 질서는 미국과 러시아의 중동 대리전으로 혼돈에 빠졌다. 미국과 러시아 등이 만든 국제적 위기로 아랍 인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이 유럽으로까지 확산되어 가고 있다. 더 이상 계급 타협이 필요하지 않게 된 순간, 자본은 일찍이 인류가 엄청난 희생을  치른 역사를 통해 얻어낸 교훈을 송두리째 무위로 만들어 버리고 있으며, 또 다른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토레 D 한젠은 미국의 트럼프의 등장이 현재의 미국이 우익 포률리스트들에의해 점령되는 새로운 징조로 설명하고 있지만, 세계 대 전후 미국이 전 지구적으로 끊임없이 치르고 있는 전쟁과 학살극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민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토레 D 한젠 류의 관점은 기존에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쟁국가 미국의 실상에 눈을 가리게 할 수 있다. 미국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실을 외면하고 있고, 정의로운 세계 경찰국가 아메리카, 팍스 아메리카의 환상에서 안주하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의 실체에 대한 외면을 끝내고 오히려 합리화하고 드러내는 계기가 될 뿐이다.
인류는 공포스러운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공포의 서사극으로부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토레 D, 한젠은 진보세력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체적이지는 않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 당시 기존 정치 세력들 특히 좌파 진영의 무능력과 연이은 패착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사민당 정권은 위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공산당은 플로레타리아트의 경제적 궁핍을 혁명의 도래가 가까웠다는 기계적 유물론에 빠져 모험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기존 정치세력들의 무능과 실패가 대중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한편으로 파시즘에 유입되도록 했다.
독일의 경우를 보면 그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결과에 당연하게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이 이미 전에 결정됐던 것처럼 그렇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빈곤한 철학과 빈곤한 성찰이 무능한 정치를 낳고 결국 파국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부룬힌데 폼젤의 이야기처럼 도대체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겠는가. 진보진영이 자멸하고 방향을 잃은 그 순간 개인들은 저항의지를 거세당하고 만다. 시민의 힘은 조직된 힘으로 발현되어야 하고 거기에 시민들의 구심점이 만들어진다. 조직은 시민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하며 올바른 전략 전술로 정치 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때로는 패배가 한 번에 패배에 불과한 경우도 있지만 결정적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참혹한 암흑기를 맞아야 하는 결정적 패배의 순간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는 역사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책임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국민의 책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은 굉장히 지난하고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범죄에 대해 당대 국민들의 책임성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당연한 명제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공동체의 합으로부터 성립한다. 나는 지난 정권에 동의한 적 없음으로 그 정권의 행위는 나와 무관한 것인가. 아니다. 그 권력이 성립되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했는가 혹은 성립된 후 그 권력의 행태에 대해 어떤 투쟁을 벌였는가. 에 대한 질문에도 답을 내려야만 한다.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스스로 올바른 결정만을 내리려는 감상적 기계적 운동은 운동을 무능하게 만들고 결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할 기회를 차단하게 만든다. 교조적인 입장에 빠져 현실적 전술과 대안을 조소하며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역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악의 평범성이 일상화 되도록 만드는 정치의 무능력이 실제로는 먼저 통찰되어야 한다. 브룬힐데 폼젠의 고백 앞에 쉽게 비난을 가하거나 동의를 표하기 어려운 것은 개인의 상상력과 행동의 반경은 주변 정치, 문화 환경으로부터 쉽게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조직된, 먼저 자각한 세력들, 조직가들, 정당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브룬힐데 폼젠이 다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소수가 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습은 어떤가. 87년 후 30년. 젊은 세대들은 현실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있고, 우익 포퓰리즘에 더 쉽게 동조하고 있는 듯하다. 난민들에 대한 혐오나 여성 혐오 등이 그 증거다. 실제로 지난 19대 대선이나 일부 여론 조사를 통해 20~30대가 정치에 무관심하고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20대가 정치사회화 과정에서 다음의 중요한 세 가지 경험을
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첫째, 청소년 시기에 경제적 위기와 그로 인
한 사회해체를 겪었다는 점, 둘째, 사회 진입 단계에서 청년실업과 비
정규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고용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셋째, 386세대나 유신 세대와는 달리, 민주화와 IMF 금융위기
이후로 급속하게 진행된 공동체 붕괴와 연대성의 상실로 인해,
연대를 통해 체제와 주류에 저항하는 집단적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20대의 정치의식 특성과 정치 성향의 형성 경로
1)이영민 사회연구 통권19호(2010년 1호), pp. 9~43
 
지금의 40~50대가 경제적으로 성장기를 거치면서 사회적 안정감을 경험하고, 87년 투쟁 등을 통해 사회 정치 참여를 통한 변혁의 시기를 경험했다고 한다면 지금의 2~30대는 그와는 반대로 사회해체의 시기에 정치적 퇴행만을 경험한 세대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앞으로 이 20~30대가 보수화 경향이 더 심화되거나 우익 포퓰리즘과 결합하는 계기가 생기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지금 보수 야당들의 무능력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단언할 수 없고, 현재 집권 민주당의 성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보세력들이 20~30대, 혹은 정치로부터 소외된 계층들에게 매력 있는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의당의 약진은 일말의 희망을 걸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정의당은 현 상태로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진보 정당으로서의 활발한 생기를 갖고 있는가. 하부로부터의 참여와 지지를 조직시키고 민주집중제를 실현해내고 있는가. 그런 의지와 고민을 갖고 있는가. 지역에서부터 자생력을 가진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해내고 있는가. 긍정적인 답보다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크게 보이는 상태가 아닌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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