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행하는 자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고건언유지, 명도약,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진도약퇴, 이도약,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建德若偸, 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건덕약투, 질진약,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선대차성.
높은 수준의 선비는 도에 대해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보통 수준의 선비는 도에 대해 들으면 긴가민가 한다.
낮은 수준의 선비는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그런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면 도라 하기엔 부족한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험한 것 같다.
높은 덕은 골짜기인 것 같고,
큰 결백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건실한 덕은 불량한 것 같고,
본질적인 진리는 구차한 것 같다.
큰 네모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되고,
큰 음악은 소리가 희미하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를 은밀한 무라고 이름한다(道隱無名).
오직 도를 행하는 자만이
좋게 시작하고 좋게 완성할 수 있다.
-도덕경 41장
-도은무명(道隱無名): 도를 은밀한 무라고 이름한다. 밝게 드러난 유(有)의 세계는 은밀한 무(無)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유와 무는 서로 살린다-도덕경2장” “유와 무는 동시에 나와서 이름은 다르게 불리지만, 동일한 것을 가리키니 현묘하다-도덕경1장”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나와 남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를 긍정하는 관계속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 나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남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태복음22:37~40
세상은 부와 명예로 사람의 급을 나눕니다.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들이 유행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노자는 도를 대하는 태도로 사람의 급을 나눕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上士)·보통 수준의 사람(中士)·낮은 수준의 사람(下士)으로 말입니다.
낮은 수준의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비웃습니다. 보통 수준의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긴가민가 합니다. 오직 높은 수준의 사람만이 도에 대해 들으면 부지런히 행합니다.
니체는 정신의 발전 수준에 따라 사람의 급을 나누었습니다. 세속의 기준을 노예처럼 짊어지고 가는 낙타, 그 기준에 의심을 품고 투쟁하는 사자, 자기의 기준을 창조하는 아이가 그것입니다.
낮은 수준의 사람은 낙타입니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걷습니다. 세상의 규칙, 성과, 체면, 비교, 효율 같은 것들을 등에 가득 싣고요. 이렇게 세속의 기준을 지고 땅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도는 낙타의 짐을 내려놓게 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져라, 비워라, 부드러워져라” 같은 말은 낙타에게 ‘비상식’처럼 들립니다. 낙타는 짐을 내려놓는 순간, 자기가 서 있던 세계가 무너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비웃음으로 방어합니다. 비웃음은 사실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얼굴입니다.
보통 수준의 사람은 사자입니다. 사자는 낙타처럼 짐을 그대로 지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짐이 “원래부터 옳은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사자는 세속의 기준과 싸웁니다. “왜 꼭 그래야 하지?” “누가 정한 룰이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존 질서를 향해 발톱을 세웁니다.
보통 수준의 사람은 도에 대해 들었을 때 긴가민가한 상태에 머뭅니다. 이게 바로 사자의 내면입니다.
도는 분명 더 높은 길처럼 보이는데, 동시에 세상은 그 길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내려놓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내려놓으면 손해 볼 것 같고, 낮아지는 것이 옳은 것 같은데, 낮아지면 무시당할 것 같고,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부드러워지면 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한쪽으로 확 뛰지 못하고, 투쟁 속에서 흔들립니다.
사자는 낙타를 벗어나기 위해 싸우지만, 아직 아이는 아닙니다. 사자가 가진 힘은 주로 “아니오(No)”에 있습니다. 기존 기준을 부수는 힘, 거부하는 힘, 반항하는 힘이지요. 그래서 사자는 때때로 도를 따르고 싶어 하다가도 도를 완전히 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사자가 ‘보통 수준’으로 불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자는 이미 낙타의 삶에 균열을 냈기 때문입니다. 낙타는 비웃고 끝내지만, 사자는 적어도 긴가민가하게라도 붙잡아 봅니다. 도의 문턱 앞에서 멈춰 서서, 이 길이 진짜인지 아닌지 씨름합니다. 그 씨름이 바로 성장의 징조입니다. 낙타는 유(有)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지만, 사자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을 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자의 싸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싸움은 계속 상대를 만들어 내고, 상대가 생기면 마음은 다시 굳어집니다. 그래서 사자의 단계에서 도는 종종 ‘지켜내야 하는 신념’이 되어 버립니다. 도를 행하기보다, 도로 무장해 세상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순간, 도의 부드러운 숨결은 다시 멀어집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필요합니다. 사자의 “아니오”를 지나, 아이의 “예(Yes)”로 건너가는 것. 그때부터 도는 싸움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됩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은 아이입니다. 아이는 낙타처럼 짐을 짊어지지도 않고, 사자처럼 계속 싸우지도 않습니다. 아이는 전혀 다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새로 시작하는 힘, 그리고 순수하게 믿고 몸으로 옮기는 힘입니다. 니체가 말한 ‘아이’는 단순히 어려진 존재가 아니라, 낡은 기준을 지나 자기 안에서 새로운 기준을 창조하는 존재이지요.
도덕경 41장에서 “높은 수준의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는 말은, 바로 이 아이의 힘을 말합니다. 아이는 이해득실의 계산을 못해서가 아니라, 계산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에 덜 붙잡혀 있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낮아져라, 비워라, 부드러워져라”라는 도의 말이 비상식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 안에 숨은 생명의 법칙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아이는 도의 역설을 ‘이해’로만 붙잡지 않고, 체화합니다. 세상이 보기엔 손해처럼 보여도, 아이는 내려놓는 순간 길이 열린다는 것을 믿습니다. 세상이 보기엔 후퇴처럼 보여도, 아이는 물러남이 오히려 다음을 위한 전진일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도는 비웃음을 이겨내고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낙타의 비웃음이든, 사자의 흔들림이든, 아이는 그 모든 것을 지나 행함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는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 앞에, 어린아이를 세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3~18:4)
천국에서 큰 자는, 세속의 기준으로 큰 자가 아닙니다. 짐을 많이 진 사람이 아니라, 싸움에서 많이 이긴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 도의 흐름 앞에서 자기 기준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도덕경의 높은 수준의 사람(上士)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이기려 하지 않고, 세상과 싸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도를 믿고, 도를 따라, 자신의 삶을 조용히 살아냅니다.
이제 41장이 본격적으로 펼쳐 보이는 것은 도의 작동 방식입니다. 노자는 도를 직선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는 늘 역설의 얼굴로 나타난다고 말하지요.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험한 것 같다.”
이 구절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주로 유(有)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유의 세계에서는 선명함이 옳음이고, 속도가 능력이고, 전진이 승리입니다. 그런데 도는 그 표준을 슬쩍 비틀어 놓습니다. 도의 길에서 ‘밝음’은 종종 가리워져 보이고고, ‘전진’은 때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며, ‘평탄함’은 오히려 험하게 느껴집니다. 도는 우리가 믿는 감각을 뒤집어, 본질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도덕경 40장의 문장이 있습니다.
“뒤집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反者 道之動)
되돌아감, 뒤집힘, 반전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뜻이지요. 도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쭉” 밀고 나가는 힘이 아닙니다. 차오른 것은 기울고, 강한 것은 부드러움으로 돌아가며, 앞에 있던 것은 뒤로 물러나 새로운 길을 열어 줍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패배처럼 보이는 순간이, 도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전환점’이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연달아 이런 문장들을 꺼냅니다.
“높은 덕은 골짜기 같고,
큰 결백은 오히려 더러워 보이며,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건실한 덕은 불량해 보이기도 한다.”
아이는 이 역설을 “말로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반전을 믿고 살아냅니다.
“도를 은밀한 무라고 이름한다(道隱無名).”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자리. 그러나 그 자리가 삶을 떠받치는 뿌리입니다. 유(有)의 세계는 늘 눈길을 끌지만, 사실 그 세계의 바탕은 무(無)입니다.
여기서 “무명(無名)”은 단지 이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이름표를 붙이는 습관을 내려놓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누구를 만나도 직업, 성과, 평판으로 먼저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도는 조용히 묻습니다. “그 이름을 떼어도 너는 여전히 귀한가?” “그 기준을 내려놓아도 너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아이는 “예”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스러운 긍정입니다. 아이는 세속의 이름표를 덜 믿고, 관계를 먼저 믿습니다. 그래서 도의 “은밀한 작동”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작동은 결국 관계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나(I AM)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남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도는 멀리 있는 신비가 아니라, 오늘 말 한마디를 더 부드럽게 하는 힘이고, 내 기준을 한 번 더 내려놓게 하는 힘이며, 누군가를 규정하기보다 살려 보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게 관계가 살아나는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길 때, 도는 ‘은밀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41장은 마지막에 이렇게 끝맺습니다.
“오직 도를 행하는 자만이
좋게 시작하고 좋게 완성할 수 있다.”
도는 큰 소리로 승리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라, 조용히 완성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남들이 몰라줘도 계속되는 낮아짐, 기록되지 않아도 남는 배려, 박수 없이도 이어지는 선함. 그것이 바로 도가 “은밀한 무”로 일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41장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낙타는 비웃고, 사자는 흔들리지만, 아이는 믿고 행합니다. 그리고 그 행함은 어느 날 갑자기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삶을 바꾸고, 관계를 살리며, 마침내 모든 것을 좋게 완성합니다.
https://youtu.be/3UGE3J-U1cA?si=D6t_PtYpFa1O-r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