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고퀄리티의 라면

by 일로

어릴 때부터 쓸데없는 짓들에 온 힘을 기울였다. 중학교 때는 너바나를 능가하는 록 스타가 돼서 월드투어를 다니겠다는 다짐을 적은 인생계획을 장장 A4용지 세 장에 걸쳐 적었고, 군대에선 10원짜리 동전으로 반지를 만들거나 여분의 군번줄을 얇게 갈아 햄 써는 칼을 만들었다. 전역 후에는 <인류 재앙 가상 시나리오: 닭이 사라진다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콘셉트의 기사를 써 ‘어떻게 약을 빨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나요?’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런 몹쓸 기질은 라면을 끓일 때도 변하지 않는다. 평소에 ‘쫄깃쫄깃~ 오동통통~’한 짐승 라면을 즐겨 먹는데, 비비 꼬인 성질 덕에 이것도 그냥 끓이지 않는다. 짐승 라면만큼은 뜨겁게 먹지 않고 차게 식혀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일단 끓은 물에 양념수프와 건더기 스프를 넣는다. 한숨 김을 뺀 국물은 냉동실에 넣어 차게 식힌다. 냄비는 씻지 않은 그대로 다시 물을 넣고 끓인 뒤 면을 넣어 익힌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면이 푹 퍼질 만큼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밀가루의 글루텐 성분 때문에 차가운 국물에 들어가면 면은 다시 쫄깃해진다. 기름을 빼기 위해 한 번 푹 익힌 면을 체에 담아 찬 물에 씻는다. 냉동실 속 국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싶으면 국물에 면을 넣는다. 여기에 식초를 넣고 김칫국물을 적당히 부어준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라면에 고명이 없으면 좀 그렇다.


먹으면 진심 이런 맛이다 (출처: 요리왕 비룡-NHK)


잘게 썬 대파와 김치 몇 점을 올린다. 만약 당신이 오늘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어떻게든 시간을 죽여야겠다 싶으면 계란을 하나 삶아 면 위에 얹자. 해가 떠있을 때 요리를 했다면 어느새 저녁을 먹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반나절 동안 애써 만든 라면을 먹어본다. 면은 쫄깃하고 국물은 사 먹는 김치말이 국수 맛이다. 만족스럽다. 그냥 나가서 김치말이 국수를 사 먹으면 될 텐데 싶은 생각이 들지만 애써 무시한다. 하나만 끓이면 반나절 동안 투자한 라면을 먹고도 배고파질 수 있으니 반드시 두 개를 끓이자.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나는 순한 맛보다는 매운맛을 권한다.


그보다 더 간단한 걸 원한다면 해장라면을 추천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냄비를 두 번 써야 한다는 건 똑같지만 시간은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번엔 어떤 라면을 써도 상관없다. 참고로 나는 이럴 때 사나이 울리는 못된 라면을 주로 먹는다. 라면 봉지를 뜯기 전에 대파, 표고버섯, 청양고추, 마늘, 다듬은 콩나물을 준비한다. 대파와 표고버섯은 어슷어슷 썰어내고, 나머지는 잘게 다진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살짝 꼬들꼬들할 때 건져 찬 물에 씻는다.


if-the-203517_960_720.jpg 마...망했다. 찍어 놓은 라면사진이 없다 ㅠㅠㅠㅠ (무료이미지로 대신..)


이 메뉴의 핵심은 기름기 없는 국물을 만드는 데 있다. 면에 묻은 기름이 많이 빠졌다 싶을 때까지 씻는다. 다시 냄비를 앉혀 물을 끓인 뒤 양념수프와 건더기 스프, 손질해 놓은 대파와 표고버섯, 청양고추, 마늘, 콩나물을 넣는다. 더 매운 게 좋다면 고춧가루를 한 숟갈 퍼 넣자. 면을 다 먹었으면 여기에 밥을 말자. 취향에 따라 날계란을 풀어도 좋다. 해장에 그만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콩나물 국밥이 생각날 테지만 그래도 그냥 먹자.


보통은 쉬는 날 혼자 먹을 때가 더 많지만 가끔은 친구들이나 애인에게 위의 라면들을 대접하기도 한다. 먹은 뒤 반응은 대개 이런 식이다. “이러면 라면을 사 먹는 의미가 없잖아.” “이렇게 정성 들여 끓일 거면 돈 주고 사 먹는 게 낫겠는데.” “차라리 콩나물 국밥을 사 먹어.” 왜 다들 맛있게 먹어놓고 딴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비어있는 그릇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물론 이들 때문에 ‘쓸데없이 고퀄리티’의 라면을 끓이는 건 아니다. 한 끼 한 끼 최선을 다해 먹겠다는 자세다. 우린 먹고 살려고 온갖 고생하면서 사는 거니까. 그러려면 먹는 게 행복해야겠지. 아니, 꼭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음식만큼은 맛있는 걸 먹고 싶다. 난 그냥 맛있는 게 좋고 맛없는 게 싫다. 이렇든 저렇든 인생은 짧으니까. 아주 길어야 백 년쯤 될까? 하물며 우리가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릴 시간들은 어떠한가.


그러니 나는 쓸데없이 최선을 다해 라면을 끓일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어떻게 여행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