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멤버 홍콩』
"홍콩 사람들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야. 나는 1967년 영국 놈은 물러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지금 손주는 유니언잭을 들고 영국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야." p.238
조그만 하얀 점토 위에 얇은 침으로 고정된 알루미늄 포일로 만들어진 수많은 배들이 전시실 중앙 바닥에 가득 깔려 있다. 지난가을, 이주를 주제로 제주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된 홍콩 작가 청영의 작품이다. 작가는 구겨지고 찢기기 쉬운 알루미늄 포일로 만들어진 배는 거센 역사의 파도 속에 놓인 연약한 개별의 존재를 의미하며 이에 더해 홍콩을 떠난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그들과 함께 꾸었던 꿈, 혼자 남겨진 외로움 등 자신의 이야기를 배에 담았다.
자유를 옥죄는 법과 제도, 광장을 메운 노란 우산, 무력 진압, 홍콩을 떠나는 사람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홍콩의 상황들이 스쳐 갔다. 호기심에 작가에게 배의 개수를 물어보니, 정확하게 2,047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작가의 말에서 단순히 많은 배의 조각이 아니라, 2,047 숫자를 채워 작품을 완성해야 했는지,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1997년, 홍콩은 브리티시 홍콩에서 홍콩 차이나로 영국에서 중국이 반환됐다. 홍콩은 2047년까지 50년간 자치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2019년 송환법 반대로 촉발된 홍콩 반정부 시위와 이듬해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그동안 누려온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 지금은 잠잠해져 우리의 기억에서는 희미해졌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홍콩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시 홍콩인에게 1997년은 머리 위에 매달린 돌 같은 느낌"이었다고 설명하고 "만약 천안문의 학생들이 성공한다면, 그래서 민주주의를 쟁취한다면 우리도 권위주의적 정권 아래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라고 말했다. 6•4는 홍콩 사람들에게 시대에 순응하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p.84-5
청영과 함께 같은 전시에 참여한 또 한 명의 홍콩 작가, 클라라 청은 홍콩에서 구 의원으로 활동하던 정치 이력을 지닌 작가다. 그는 국가 보안법 이후 중국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영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지만, 망명 이후에도 홍콩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홍콩에서 수천 년 전 살았던 '로팅'이라는 반인반어의 신화적 캐릭터를 작품 속으로 가지고 와 인권 탄압에도 자유를 추구하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은유한다.
“우리에게 중국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은 거야.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결코 외면할 수 없고 뽑을 수도 없어. 영원히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도 그랬어. 내가 어른이 되면 홍콩은 중국이 되어 있을 거라는데, 그럼 변하는 거잖아? 지금과는 달라질 미래가 늘 불안했어. 이건 홍콩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감정이야." p.83-4
홍콩 시위를 두고 한국의 광주나 6월 항쟁에 비유했기 때문에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시민 정도로 홍콩의 상황을 그려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이면서도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의 정체성은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참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이 책을 만나게 됐다.
그 도시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낯선 정체성이 껄끄럽기도 했다. (…) 그래도 난 홍콩이 좋았다. 중국과 인도를 휩쓰는 민족주의 열풍보다는, 세계 시민으로서 떠다니기를 꿈꾸는 홍콩 사람들의 정서가 더 마음에 들었다. p.12-3
『리멤버 홍콩』은 홍콩과 중국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홍콩의 지금을 이해해하는 데 가이드 역할을 한다. 이 책을 통해 예정된 미래를 앞둔 사람들, 그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들이 염려하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건 홍콩도 마찬가지다. 홍콩은 스스로 영국의 일원이 되겠다고 한 적도,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 경찰 223처럼 그저 통보받았을 뿐이다. 홍콩에게 주어진 유통기한은 1997년 7월 1일까지였다. 영화에서 223은 마치 홍콩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건 없나?" p.88
이 책 읽으면 '이 도시의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홍콩으로 달려가고 싶어 진다. 2047년, 어떤 모습으로든 홍콩은 달라질 것이다. 아니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가 사랑했던 홍콩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리멤버 홍콩
전명윤 지음 | 사계절, 2021
분야/페이지 | 역사 > 동양사 / 312쪽
#홍콩 #정체성 #우산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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