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돌담에 속삭이는>
제주신화에서는 열다섯 살을 넘기기 이전에 죽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서천꽃밭’으로 간다고 믿는다. 서천꽃밭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머무는 곳, 즉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낙원이자 천국이다. 이 낙원은 오로지 어린아이들에게만 입국이 허용되는데, 그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인 까닭이다. p.189
4·3 당시의 희생자 14,738명 중 10세 이하의 어린이는 818명. 전체 희생자의 5.6%를 차지한다. 가족 전체가 몰살되거나 난리 통에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채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이 하나가 되고 세상과 지옥이 자리바꿈을 한 시절이 이서났주게. 저 기축년 난리 때 말이여. 수천수만 무고헌 목숨이 비명횡사허는 꼴을 대책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던 죄. 무엇보다 어멍들과 어린이들까지 떼죽음 당하는 걸 막지 못 헌 죄가 가장 크주게." p.134
제주 4·3 평화공원에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4·3 위령탑이 있는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각명비를 보았을 것이다. 각명비에는 4·3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과 성별, 당시 연령 등이 새겨져 있다. 이름조차 없이 희생된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OOO자의 자, 1세....
이처럼 뚜렷하고 명확하게 4.3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게 있을까?
애도의 기회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린 이들...
우리들의 몸은 아주 작고도 작아. 유리처럼 투명하고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야.
언젠가 한낮의 강변 모래밭이나 풀덤불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을 본 적이 있을 거야. 그냥 유리 조각이나 모래알인 줄 알았겠지만, 실은 그건 우리들이었을지도 몰라. (....)
꽁꽁 언 눈밭 양지쪽에 성급한 봄꽃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거나, 혹은 울창한 숲 그늘 한쪽에 마치 숟가락으로 오려낸 듯 비좁은 틈새로만 유일하게 햇볕이 노랗게 내리쬔다면, 그건 바로 가까이에 우리들이 있다는 증거야. p.207-9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 일상의 공간에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그곳에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머물렀던 아이들, 여유도 모른 채 그냥 세월을 잘못 만난 죄로 너무도 일찍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가야 하는 그 길 마저 잃은 너무도 어린 희생자들. 그들의 흔적은 이따금씩 우리도 느낄 수 있는데 ‘유리 조각이나 모래알인 것 같은 반짝이는 작은 빛', 혹은 '한 여름밤의 춤추는 반딧불', 바람 없이 '혼자 파르르 떨리는 나무 이파리’, ‘봄날 내 손에 담았는 작은 햇살'이 그 흔적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따금씩 마주하는 풍경들이 그들이 다녀간 흔적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
아주 작고도 작지만, 우리 가까이에 존엄한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린 이렇게, 당신들 눈앞에 존재하고 있어.
그럼에도 당신들은 우릴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면 당신들이 애초에 우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 보려 하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야. 애당초 들으려 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리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는 거야. p.49
끔찍한 것은 이러한 비극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촉발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4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전장이 된 가자지구에서는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전체 인구의 약 1%가 사망했고, 80% 이상이 난민이 됐다. 하루 평균 100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희생된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피를 봐야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얘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봐 선 안 돼. 너무 많은 죽음을 본 사람은 장차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어. 사람들 속에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돼. 몽희야, 엄마가 하는 말 잊지 마. 지금 저 사람들은 죽은 게 아니야. 진짜로 죽은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 같은 어린아이들은 이제부턴 절대로 죽는다, 죽었다, 죽인다, 죽였다,라고 말해선 안 돼. 그건 틀린 말이야. 저 사람들은 죽은 게 아니 야. 그냥 꽃송이가 되어 땅에 툭 하고 떨어진 거란다. 사람들이 아니라 꽃이, 꽃들이 떨어지고 만 거야. 그냥 동백꽃이야. 그냥 유채꽃, 그냥 무꽃, 그냥 제비꽃이야. 몽희야, 알겠니? 그러니까 너도 이제부턴 그렇게 말해야 돼. 그렇게 믿어야 해. 그렇게 기억하고, 그렇게 믿어버려야만 해. 그래 야만 앞으로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어." p.55
✍ 해원, 서천꽃밭 가는 길
임철우 지음 | 현대문학, 2019
분야/페이지 | 문학 > 소설 /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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