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노트

유령의 배회, 코치를 걷는 시간

『유령 연구』와 코치-무지리스 비엔날레의 경험

by DAPLS 이혜령

이번 인도 여행에 그레이스 조의 『유령 연구』를 가져간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특히 코치-무지리스 비엔날레를 둘러보는 동안 이 책은 전시를 이해하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나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경유해 전시의 여러 맥락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정체성 위기에서 출발한다. 스물세 살 무렵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미군을 위해 기지촌 성매매를 제도적으로 관리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가족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 발견은 그녀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가족과 국가의 서사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이를 계기로 저자는 말해지지 않은 것, 특히 침묵과 공백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그 의미를 추적해 나간다.


가족의 침묵과 국가의 침묵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며, 개인의 기억 속 공백이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역사적 폭력의 결과라는 점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이 공백을 단순히 메워야 할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머무르며 침묵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는 장소가 된다.


『유령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미군 주둔, 기지촌 성노동, 디아스포라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트라우마를 추적한다. 특히 ‘양공주’는 군사주의와 성적 지배, 그리고 초세대적으로 전이되는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로 등장한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배제되었고, 공식 역사 속에서는 지워진 ‘유령적 존재’로 남겨졌다. 그러나 지워진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흔적의 형태로 남아 현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령’은 바로 이러한 존재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유령은 죽거나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과거가 현재 속에서 지속되는 방식이다. 이는 삭제된 역사가 다른 형태로 귀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정신분석학자 니콜라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이 제시한 ‘초세대적 배회’ 개념, 그리고 사회적 삶 속에서 과거의 폭력이 지속된다고 보았던 에이버리 고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트라우마는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침묵과 정서, 관계의 형태로 다음 세대의 삶 속에 스며든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아스포라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존재 방식이다.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많은 여성들의 이주는 개인적 선택의 결과로 서사화되었지만, 실제로는 전쟁과 군사 점령이라는 구조적 조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꿈, 환상, 단편적 기억, 침묵과 같은 비전통적 자료를 통해 삭제된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말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새로운 글쓰기 실천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코치 비엔날레를 경험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전시는 기억과 부재, 잔존과 귀환이라는 감각을 다양한 시각적 언어로 드러내고 있었고, 『유령 연구』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해석 틀이 되었다. 전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흔적과 공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역사와 존재의 방식이다.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전시 공간 곳곳에서 감각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식민의 흔적이 여전히 공간 속에 남아 있는 코치라는 도시에서 『유령 연구』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식민과 제국, 이동과 폭력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이후의 삶과 공간 속에서 계속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우리는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알 수 없는 역사와 타인의 삶에 연루된 채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되기, 살아남기,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를 보는 동안, 나는 이 책이 단지 과거를 설명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현재를 감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령 연구』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여기 머물고 있는 것들을 인식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것은 침묵 속에 남아 있는 역사적 잔존을 드러내고,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 과거의 흔적들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비로소 인식하게 만든다.


『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 성원 옮김 | 동녘, 2025
사회과학 > 여성 | 396쪽
#디아스포라 #트라우마 #탈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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