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다라 Jan 05. 2021

그림쟁이의 고민,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실패한 예술가의 고백 Vol.8








그동안 했던 그림과 관련된 고민들을 되짚어보면,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혔던 것만 같다.

고민하고 해답을 찾았다가 시간이 지나 똑같은 고민으로 또 잠을 못 이루는 것의 반복.

친구에게 말하다 보면 데자뷔를 겪는 것 같은 기분.


내가 하는 그림 고민들은 대체로 어디 가서 말하기 남부끄러울 정도로 사소하거나 유치할 때가 많았다.

주변에 그림을 그리는 동료도 전혀 없어서, 털어놓고 답이나 조언을 구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하며 묵은 체증이라도 내릴 수 있는 길도 없었다. 

그저 혼자 그림 관련 책을 읽거나 작가들의 인터뷰, 유튜브 등을 통해 

더듬더듬 답을 알아내 볼 뿐이었다.


/


그림과 관련해서 단 하나 자신 있는 게 있다면, 

그림쟁이가 저잣거리(?)에서 할 법한 웬만한 고민들을 다 해봤다는 것이다.

거기에 속 시원한 답까지 가지고 있다고 할 순 없지만(사실 그림과 관련된 대부분의 고민들은

계속 그리고 많이 그려보는 것이 답일 때가 많다), 적어도 '그 마음 뭔지 알아'하며 

맞장구 신나게 쳐줄 前 그림쟁이 친구는 되어줄 자신이 있다.


/


실.예.고 시리즈 마무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전문성 전혀 없는 야매(?) 그림쟁이지만, 비슷한 고민을 했거나 하는 그림쟁이가 있다면

공감하고 공유할 만한 이야기를 하며 마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나 '나도 그랬어!'가 아니라 '나만 그랬어?'가 될까 봐,

괜히 우스운 꼴만 보이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지만...

그래, 우스운 꼴 좀 당하면 어때?(... 아닌가?)







[돌고 도는 그림 고민 List]


1. 그림체, 그림 스타일에 대한 고민해 본 적 없나요?


솔직히, 그림으로 뭐 좀 해보려는 사람 치고 이 고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이 고민이 생기는 이유가 '그림으로 뭐 좀 해보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으로 뭘 해보겠다는 목적이 없이, 그림 자체가 목적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고민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그려지는 대로 그리면 된다. 


그림이 수단이 되면, 기업의 마케팅이나 브랜딩 전략에 버금가는 '기획 마인드'가 나도 모르게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그리고 있어야 내 그림이 또는 내가 쓸모 있어질까,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까, 찾음을 당할까, 돈을 벌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다 보면 내 그림이 마뜩지 않아지고 그게 바로 '그림체, 그림 스타일'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민은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해결책이 간단(?) 하다.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계속 많이 그려보는 것'.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 세라믹 디자이너이기도 한 로라 칼린(Laura Carlin)의 어느 강연 영상에서 그림 스타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자신도 그림 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그 고민을 놓아버리자 지금의 그림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라고 했다. 스타일을 '찾겠다, 만들겠다'라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더니 비로소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자기만의 그림 스타일, 개성이 되었다는 뜻일 테다. 


100이면 100 모두 글씨체가 다른 것처럼(비슷한 스타일이 있을 수는 있어도) 분명 각자 자기가 타고난 그림체가 있다. 그것을 믿고 계속 그리다 보면 익숙한 습관이 붙기도 하고, 자기만의 시선(그림은 자신이 보는 대로 표현하게 되니까)이 그림에 반영됨으로써 총체적으로 ○○의 그림이 분명해진다. 그게 곧 그림체이자 스타일 아닐까?


이 무슨 실망스러운 답변인가 싶겠지만, 내 경험을 비추어보아도 그러했다. 목적을 달성하기에 금전적, 시간적,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고 조급해지니까 '그림체'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괴로워했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 고민고민하다가도, 체했을 때 먹어서 내린다는 맛녀석들처럼 계속 그렸다. 자꾸 그리니까 결국엔 손에 익으면서 마음에도 드는 표현법이 저절로 나타났고, 그렇게 그리고 있으면 그림체에 대한 고민은 아예 사라졌다. (물론 한 번 해결되었다고 그림체 고민이 영영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말했듯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오고 돌아왔다.) 다른 사람 그림을 봐도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게 바로 '내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내 그림이 사랑받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 거의 '운'에 달리지 않았을까.) 


혹시 그림체, 그림 스타일을 고민하고 있다면 지금 자신이 그리는 그림이 남과 비교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은 아닐는지? 다른 누군가의 그림이 부럽거나 사실 그 그림체가 갖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거나, 본인의 그림이 시장경쟁력이 떨어진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인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 맞든 안 맞든 상관없다. 머리를 좌우로 탈탈 털어 그런 생각을 버리고, 그리고 싶은 대로 맘껏 그리시길:)



2.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 같아 심장 두근거린 적 없나요?


이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 잘못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쁜 마음을 먹고 따라 한 뒤 제 발 저린 도둑의 마음은 논외다.) 표절을 옹호하거나 종용하는 것은 아니고, 나는 이 고민이 '고민'이 된 가장 큰 이유가 'SNS'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 하면서 배우는 것도 분명 좋은 방법인데, 아직 노출되지 말아야 할 때 노출이 되고, 손가락질 또한 쉬워지면서 따라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준 것 같다. 때때로 표절의 기준이 명확히 공유되지 않아 표절이 아닌데도 '그냥 느낌이 비슷해서, 그런 것 같아서' 등의 애매한 이유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면, 그것을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커져 혹시나 나도 트집 잡히지 않을까, 분명 따라 하지 않았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봐 자가검열을 필요 이상으로 하게 된다. 무슨 창작순수령이라도 있는 것처럼 편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괜히 겁먹고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견디다 못해 나는 기준을 정했다. 1. 연습은 뭐든 해도 괜찮다. 맘껏 따라 해 본다. 대신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내 것으로 만들거나 하는 게 아닌 그냥 따라 하는 단계라면(명화 모작을 제외하고) 공개하지 않는다. 2. 나를 믿는다. 남의 것 따라 해서 좋은 그림 그리는 것도 기술인데, 나는 그 정도 실력이 안 되더라. 게다가 지구력이 나쁜 건지 기억력이 나쁜 건지 첨엔 좀 그럴듯해도, 몇 장만 더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따라 하며 익힌 건 물이 빠진다. (나혼산에 나왔던 유아인 배우의 말처럼 근본은 바뀌지 않더라.) 설령 나쁜 마음먹고 따라 해도 제대로 이용 못하는 인간이니 해볼 테면 마음껏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그냥 그린다.  



3. 해시태그를 잔뜩 달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현타 온 적 없었나요?


나도 도도하고 고고하게 캡션 자리 깨끗하게 두고 그림 업로드하고 싶은 마음 솔직히 있었는데, 어디서 였지, 이 말 한마디 듣고 생각을 바꿨다. '외국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에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들이대라고 독려한다'라고. 댓글이나 DM으로 내 피드 보러 와줘, 팔로우해줘 하는 것들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연히 갖춰야 할 적극성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같은 것을 가지고 누군가는 구질구질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적극적이라 한다면, 빽빽한 해시태그가 문제가 아니라 내 인식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타 오는 마음 뭔지 알겠으나, 그걸로 한 명이라도 더 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면 해볼 만한 노력 아닌지요? 



4. 전공을 하지 않았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자꾸 쭈구리(?) 모드가 되진 않나요?


그림을 학벌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림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입시미술을 경험하지 않고 미대 전공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미술활동이 '야매'이고 늘 실력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겨내지 못했다. 회피하고 회피하며 괜찮은 척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무너졌다. 재작년에 사이버대학교를 통해 미술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고 시도는 해봤으나 앞선 글에서 밝혔듯 수업을 챙겨 듣고 커리큘럼을 따라갈 상태가 아니라 생애 처음 '자퇴서'라는 것도 내보며 포기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동안의 신뢰(?)가 다 깨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림 그리는 직업과 전공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내로남불 아니고 내불남로...?) 만약, 전공을 꼭 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우선 본인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결정하는 건 필요할 것 같다. 


나처럼 그런 타이틀(비단 타이틀뿐만이 아니라 짧게는 4년 길게는 그 이상의 밀도 높은 미술 경험)이 뒷받침되어줘야 자신감이 생기는 타입이라면 대학이나 아님 추후에 대학원이라도 가는 게 나을 것 같고.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티스트 레지던시 같은 곳에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이 '미술 전공자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도 결정할 때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5. 막막할 때 도움받았던 '그림 관련 콘텐츠' 추천


책 : <드로잉의 정석> 백남원 저 <-  선긋기에서부터 그림 구성하는 것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데,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사람(특히 독학으로)에게 강추하고 싶은 책. 


/


이연 님의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Kw7Jsu2cMU_D4yK8VMms1Q

수경화실 방송국 https://www.youtube.com/user/blueline0805

닥터보노 https://www.youtube.com/channel/UCgBnOvE3E6LlCFX-kzQCjuQ


/


무료 인체 드로잉/누드크로키 연습 : https://line-of-action.com/practice-tools/figure-drawing#


* 위 사이트는 저도 '이연'이라는 분의 유튜브를 보다가 알게 된 사이트인데,

누드 크로키, 인체 드로잉 연습을 온라인상으로 해볼 수 있는(레퍼런스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링크 들어가셔서,


1. 모든 모델 / 누드모델만 / 옷 입은 모델만 중 선택

    +  둘 다 / 여성 모델만 / 남성 모델만 중 선택

2. 일정한 시간에 따라 사진이 변경되는 모드로 할지/ 수업 모드(한 사진을 길게 보기)로 할지 선택   

3. 원하는 크로키 시간 선택


을 누르시고 'Get Drawing' 버튼 누르시면 됩니다.


사진 양이 정해져 있어 같은 사진이 여러 번 나오기도 하고 버퍼링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직접 모델을 보고 드로잉 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면 

이렇게 연습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추천합니다!









간직하고 싶은 그림 몇 장을 빼놓고 모든 그림들을 정리했다.

(버렸지만 '버렸다'는 단어를 쓰려니 속이 너무 쓰리다.)

박스를 한가득 채운 종이들을 보며 그래도 나 꽤 열심히 했다 싶었다.

애틋한 마음으로 챙겨서 폐휴지 버리는 곳에 내놨다.


음... 다음날 외출하는 길에 마주한, 내 이름이 적힌 그림들이

빌라 앞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끝까지 웃프구나.



/



이제 진짜 안녕!












P.S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저는 드로잉을 해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를 하고, 

마플샵에 굿즈를 등록하고, 리얼패브릭에 패턴 디자인을 등록할 테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그림을 좋아하고 취미로 하는 사람'의 위치에 놓으려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데 무슨 마무리가 이리도 거창한 가 싶겠습니다만,

해보니까 마음으로 놓는 게 제일 힘들더군요.


이렇게라도 하니까 그래도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잘 받아들여지네요.

부디 그림쟁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길 빕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이렇게 써먹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