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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스터 Jun 17. 2018

인도 가보니 별 것 없더라

별 세계를 찾아 떠난 인도 여행

2015.02.01.~2015.02.24.

인도


류시화 시인의 책을 읽었던 중학생 시절부터, 내 꿈의 여행지는 언제나 인도였다. 주위 사람들은 낭만의 나라 프랑스나, 자유의 나라 미국이 아니라 왜 하필 더럽고 냄새나고 푹푹 찌는 인도냐고 반문했다.


내가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건 분명 아니었다. 류시화가 글을 잘 썼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수천, 수만 명이었다. (아마 한국인 인도 관광의 역사는 그의 책 발간 전후로 나뉠 테다.) 내가 인도에 가고 싶었던 것은 더럽고 냄새나고 푹푹 찌는 나라여서가 아니라, 인도가 바로 내게 낭만과 자유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아내를 위해 지었다는 무덤, 타지마할. 현재는 인도의 상징이다.


이런 저런 일로 인도 여행을 취소하거나 미뤄오기만을 수 년. 2015년 겨울에서야 꿈의 나라 인도에 가게 됐지만 사실 기대 가득한 준비나 출국일을 손꼽는 설렘은 없었다. 해가 바뀌고도 한 달을 더 묵은 우울함과 그 우울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이겨내 봐야겠다는 조급함만이 있었을 뿐.      


2014년 여름, 1년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어느새 나에게마저도 생각 없는 고학번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친구들이 재바르게 학점을 따고, 인턴을 하고, 스펙을 쌓는 동안, 나는 하루 종일 공원에 누워 해를 쬐거나, 친구들에게 요리해준다고 하루를 통째로 보내버리거나, 수업도 빼먹고 근처 국가로 여행을 떠나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이라도 무엇인가라도 해보자’ 했던 4학년 2학기마저 별일 없이 끝나 버렸다. 한국에 돌아가면 초조해하지 말고 나의 속도대로 부지런히 즐기고 배우며 살아가자고 새겼던 다짐은 희미해지고 2014년 말의 나는 어느새 내 스스로를 닦달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만 받)기에만 바빠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2015년의 겨울방학을 겨우 한 달 남겨두었던 1월 말, 동생과 같이 세 명이서 인도를 가자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엄마가 인도에 가고 싶었던 구체적 이유는 따로 있겠으나, 당시의 내게는 마치 인도 여행이 모든 답을 전해줄 것처럼만 들렸다. 요가의 나라, 명상의 나라, 부처의 나라, 인도에만 가면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다는 소와 원숭이들 속에서, 세상의 진리를 터득한 사두(힌두교 고행자)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누는 내 모습을 마음에 그렸다. 현대문명의 이기와 논리로부터 떨어져 더럽고 위험천만하지만,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에서 다양한 좌충우돌을 겪으며 깨닫고, 반성하며, 성장할 내 자신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도를 가게 된 것이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티켓을 구매한 우리는 남들은 한 달 넘게 준비한다는 인도 여행을 단 며칠 만에 마무리 지어버리고는 인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리는 커다란 배낭 하나씩을 각각 짊어지고 떠났다.


재미없게도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설레는 시작도, 온갖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했던 과정도, 보람과 아쉬움의 감정이 한 데 뒤섞여 복받쳐 오르는 결말도 없었던 여행이었다.


내가 경험한 인도는 그저 사람 사는 곳이었다. 우선 인도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안전한 곳이었다. 인도 여행을 가기 전 우리끼리의 가장 큰 화두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걱정을 샀던 문제도 안전이었다.


기차 안에서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누가 갑자기 올라타더니 훔쳐갔다는 얘기부터, 온갖 짐승과 탈 것과 사람들이 한 데 엉켜 만들어 내는 혼란 속에서 눈 뜬 채로 당했다는 소매치기와 성추행, 그리고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폭력 및 살인 사건까지, 소문 속에 들리는 인도는 딴 세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내가 인도에 기대했던 것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범죄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법과 규율에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도록 요구되는 사회에서 벗어나 혼돈 속에서 경험하는 긴장감을 느껴보고 싶었단 의미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막연하고도, 터무니없으며, 복에 겨운 상상이었다. 어쨌든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기 및 범죄의 대상이 될까 봐 우리는 아주 조그만 호의에도 경계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았으며, 애먼 상대를 의심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예민하게 구는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인도에서의 여행을 시작했다.


지붕에도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은 버스.


물론 인도는 한국과 달랐다. 오토 릭샤(일종의 택시)가 뿜어내는 매연 속에서, 온갖 가축과 그들의 배설물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조금이나마 먼저 지나가려고 앞뒤로 밀어대는 수많은 사람들 속을 걷는 일은 예사였다. 실제 가격보다 많게는 두, 세배까지 높여 부르는 상인들의 마케팅(!) 수법도 넉살좋게 받아들여야하는 일상이었다. 내가 인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만 해도 여러 사건, 사고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인도에는, 우리가 실수로 땅에 떨어뜨린 물건을 친절히 주워 건네준 아저씨도 있었고, 우리의 목적지였던 힌두교 사원까지 직접 데려다주고 그 안을 함께 돌며 설명까지 해준 대학생도 있었고, “인디안 프라이스(indian price)”를 외치며 우리 대신 기꺼이 흥정을 해준 어린 여중생들도 있었다.


인도는 가방이나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귀중품을 훔쳐가려는 미심쩍은 손길이나 어두운 밤길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사람들만이 우글우글한 곳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야 굳이 인도가 아니라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는 법인데 나는 특별히 인도만이 혼돈과 무질서의 극치인 것처럼 상상했었다.


인도는 조금 더 혼잡스럽기는 하지만, 여느 곳과 같이 그냥저냥 무던한 다수의 사람들과, 특별히 조금 더 친절한 사람들과, 특별히 조금 더 못된 마음을 먹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두 살아가는, 일반의 장소였다. (물론,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충분히 조심한다면 꽤 안전한 곳이라고, 여행 중에 만난 대다수의 여행자들이 동의했다.)


한가로이 앉은 소들.


그런데 내가 인도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할 때, 사실 방점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 찍혀있다. 인도는 특별한 존재들이 사는 신비의 나라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물론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사두들을 볼 수 있었다. “람람 사뜨야헤(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는 의미의 힌두어로, 인간은 결국 모두 죽기마련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한다)”라 외치며 시신을 들고 화장터로 향하는 엄숙한 무리들을 지나쳐 가기도 했으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감싼 불길을 바라보는 사람들 옆에 한참을 서있기도 했다.


동물의 배설물과, 타다만 시체와, 그 밖의 여러 가지 폐기물 따위가 모두 뒤섞여 도저히 살갗에 닿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갠지스 강물에 들어가서도 경건하고도 평화로이 목욕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라나시에서 조차 내가 더 많이 보았던 것은 아침 일찍부터 골목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사람들의 빗질과, 구슬치기를 하는 어린 아이들의 소란과, 관광객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는 사공들의 외침과, 동그랗게 모여 앉은 할아버지들의 카드놀음 등이었다. 생경하고도 신비로운 공간에서 삶의 깨달음을 얻기를 희망했던 한 철없는 여행자 앞에서, 사람들은 그토록 열심히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갠지스 강의 목욕도 사실, 삶의 업보를 씻어내고 보다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이었지, 산골짜기 신선들의 놀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생으로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의 조건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감히 말하지만, 수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꼬질꼬질한 옷차림의 비쩍 마른 한 사두가, 조용히 다가와 손을 내밀며 구걸을 했을 때 내가 느꼈던 초기의 당혹감이란. 애초에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인간이란 없었던 것이다. (혹은 그러한 인간은 있지만, 아직까지 이 세계에 남아있는 자들은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도 무엇이든 먹어야 했고, 그러니 돈이 필요했다.


구슬을 좀 더 따기 위해, 돈을 조금 더 벌기 위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도 생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인도였다. 그리고 그건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다.


갠지스 강의 풍경. 빨래하는 아주머니와 카드 치는 아저씨들과, 배를 한가득 메운 관광객들.


긴장되는 상황. 이기기 위해선 구멍에 구슬을 정확히 위치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두들과 같이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고된 수행을 하기는커녕 삶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언제나 무엇인가를 열심히 욕구하는 내가, 고작 인도에 갔다고 삶의 진리를 그토록 쉽게 깨달아 속세를 초월 해내고 말았을 리가 없다.


고로 내가 기대했던 영원한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는 없었다. 다만, 결국 모두 죽어 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이 바로 옆에 보이는데도, 그토록 열심히 한국에서든, 인도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생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문득 느껴져 조금은 허망하기도 했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고, 조금은 용기를 얻었다.


갠지스 강둑의 한 남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건 삶의 진리일 수도, 그러나 어쩌면 저녁메뉴일 수도.


인도에서 돌아오고 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그간 엄마와 나는 “인도 어때? 콜?”하며 수없이도 인도 여행을 다짐했건만, 아직 한 번도 다시 가질 못했다.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인도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그만큼의 시간을 낼 여유가 –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여유가 –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꼭 다시 인도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인도도 결국 인간 사는 곳이더라는 별 것 없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고 올 뿐일 테지만, 그 어느 곳에도 신비의 세계와 단번에 얻어지는 삶의 진리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면 또 한 번 조급증을 내려놓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조그마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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