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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스터 Nov 16. 2018

영원한 건 절대 없지만

영화 <미쓰백>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 G-dragon의 <삐딱하게>



“개 한 마리 키워본 적은 있어?”
영화 <미쓰백>에서 지은의 계모 미경은 폭력의 현장으로부터 지은을 구해내려는 상아에게 묻는다. 동물 한 마리 키워본 적 없으면서 감히 지은을 데려가 잘 키울 수 있겠냐는 의미인데, 이 말은 상아의 폐부를 찌르고 말아서 결국 상아는 지은의 손을 놓고 만다. 강아지를 키워보기는커녕, 살인미수범 신세로 근근이 살아가는 자기 처지에 괜한 오지랖을 부린다 생각했을 테다.


지은의 계모, 미경


성폭행 가해자를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교도소 생활을 한 상아(미쓰백)


물론 관객들은 안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아니 심지어는 죽길 바라며 지은을 무자비하게 때려놓고, 부모 자격 따위를 운운하는 미경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다행히도 상아는 그런 미경의 방해공작과 스스로의 자격에 대한 자기검열을 이겨내고, 결국 지은의 곁에 선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보듬으며 말이다. 지은의 하교 길에 상아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해피엔딩까진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안도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함께 떠나는 상아와 지은


그런데 미경의 질문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상아가 지은에게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하고 묻고, 지은이 그런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하고 답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G-dragon이 머리 흔들며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고 노래 부를 때 말하고자 했던 바 같은 것인데, 그 지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금 돌아 상아 친모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상아 친모의 속사정을 꽤나 큰 비중을 들여 묘사한다. 남편과의 이별 후 상아를 때려 트라우마를 안긴 장본인이지만,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깨닫고는 상아의 새 삶을 위해 그녀를 놓아줬다는 이야기다. 상아는 형사이자 애인인 장섭으로부터 이를 전해 듣고는 오열하는데, 자신을 때렸던 엄마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기만 했던 것은 아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상아 친모가 울고 불며 자신의 폭력을 경찰 앞에서 자백하는 장면이나, 상아를 보육원에 맡기기 전 놀이공원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까지 보고 나면 관객으로선 감히 상아 친모의 모성애를 의심할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른 뒤, 딸의 집 앞을 찾아온 상아 친모


이 사실은 한편으론 좀 불편한데, 아동 폭력이라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를 동정과 이해 혹은 사랑 따위로 얼버무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쓰백>이 아동 폭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까지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그와 같은 해석은 너무 손쉬워 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상아 친모는 상아를 때렸지만 사랑했다’라고 말함으로써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상아를 사랑했지만 결국 때리고 만 것’이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과 폭력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님을, 그러니까 둘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실제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지은을 때리는 미경도 한 때는 지은에게 나름대로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부분들이 영화 곳곳에 암시된다. 그녀가 상아에게 피부 관리를 받으며 지은을 향한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거나, 한때는 꽤나 정성 들여 입힌 것으로 보이는 지은의 원피스가 대표적이다.

 

분홍 원피스를 입은 지은


따지고 보면 그렇다. 보통 우리가 노래하는 사랑은 상대를 위해 무엇이든 내 줄 수 있는 헌신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실제 사랑의 모습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처음에는 마냥 아름답고 긍정적인 감정들로만 채워졌던 사랑은 어느새 질투와 의심, 자격지심과 분노 등 다양한 감정과 공존하게 된다. 영화 <어느 가족> 또한 만비키 가족을 마냥 행복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것으로 그들이 사실상의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노부요와 오사무는 할머니 하츠에의 재산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지길 기대하고, 남자 아이 쇼타는 일부러 경찰에게 잡혀 가족에게 시련을 안긴다.


영화 <어느 가족>


서로 아끼며 함께 살을 부대끼는 것과 별개로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쩌면 완전무결하게 살아가는 모습보다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에 대한 배려보다 나의 이해를 더 앞세웠던 경험이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했던 적도 많다.


그래서 G-dragon이 말했듯 지금은 강한 공감과 연대로 똘똘 뭉친 상아와 지은이지만, 그 감정이 언제까지고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이사이에 질투라든지, 분노라든지, 자격지심이라든지, 하는 감정들이 끼어들 테다. 영화는 미경으로 하여금 상아에게 “개 한 마리 키워본 적은 있어?”하고 묻게 함으로써,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경의 뻔뻔함을 드러내거나 상아의 자격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을 하고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인데 그 준비가 되었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상아는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조금씩 이해해나가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과 지은에게도 언젠가 고비의 순간(그것이 꼭 폭력의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점 말이다.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른 엄마’는 ‘나와 다른 나쁜 사람’이라고 거리 두기 쉽지만, 그런 엄마에게도 사랑과 애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과 지은과의 관계는 그와 다를 거라 자부하기 쉽지 않다.


상아와 지은


따라서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은과 상아의 관계가 위태롭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아동 폭력 피해자로서 연대감을 나누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엄마가 자신을 미워해서 때린 것이 아니라 사랑함에도 때렸다는 것을 알게 된 상아는 지은과의 관계에서 좀 더 사려 깊을 것이니까. <미쓰백>이 아동 폭력을 감상적으로 그려낸다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굳이 공을 들여 상아 친모의 속사정을 그려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이이든, 강아지이든,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랑 이상의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를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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