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유럽을 혼자 여행한다는 것
2014.01.20.~2014.01.24.
암스테르담, 브뤼헤, 브뤼셀
“너무 외로워서요... 뭐든 괜찮으니 좀 따라다녀도 될까요?”
난생 처음 본 남자에게 불쑥 이렇게 물었다.
1월 중순의 어느 저녁 브뤼셀에서.
마치 로맨틱한 스토리의 시작 같지만,
사실은 겨울 유럽을 홀로 여행하다 지친 여행자의 구질구질한 호소였다.
시작은 이렇다.
2014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영국에서의 교환학생 생활 한 학기를 마친 나는 무작정 여행길에 오른다. 3개의 영어 페이퍼를 꾸역꾸역 써낸 다음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도저히 다음 학기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인데, 다른 친구들은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혼자 다니는 것을 꽤나 즐겼던 터라 일행 없이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2박, 벨기에 브뤼헤에서 1박을 한 뒤 브뤼셀로 넘어가 구경을 하고 새벽 1시 30분 버스를 타고 뉴캐슬로 돌아오는 여정. 임팩트하면서도 나름대로 알찬 구성이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는 것.
여행 내내 날씨가 꾸리꾸리한 데다 해가 4시경이면 져버리니, 여자의 몸으로 혼자 여행하는 나로선 행동반경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라곤 식당과 술집 정도밖에 없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묵었던 도미토리에서는 함께 다닐 친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술집은 내 선택지에서 배제됐다. 여행의 묘미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여행지의 독특한 문화를 최대한 체험해 보는 데 있는데, 둘 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참으로 쓸쓸할 수밖에.
그럼에도 돌아가 내 몸 누일 숙소라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나는 곧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행의 마지막 날의 일이다. 브뤼헤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브뤼셀로 넘어온 나. 이미 볼 건 다 보고, 먹을 것도 다 먹었는데, 아직 오후 7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해는 이미 져버린 상태였다. 영국 뉴캐슬로 돌아가는 버스는 새벽 1시30분 출발. 게다가 나는 5일 간의 짐이 든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중대한 결심을 내리는데, 브뤼셀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작정 말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동포애니, 한국인의 정이니, 사실 좀 촌스럽다 생각하던 나였는데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한국인과의 수다더라.
첫 번째 타겟은 혼자 사진을 찍으려 하는 동양인 여자. 이때다 싶어 친절함을 내뿜으며 내가 사진을 찍어줄게요, 하며 다가갔으나 상대는 영어를 잘 못하는 일본인. 결국 내 음흉한(?)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진만 찍어준 채 그녀를 순순히 보내줬다.
아쉬움은 달래던 중 내 눈에 띈 사람은 어느 동양인 남자. 그런데 아까와 같은 사진이란 매개가 없이, 그것도 이성에게 불쑥 말을 걸자니 왠지 민망하더라. 결국 우물쭈물 한 사이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광장을 둘러봐도, 동양인은 단체 관광객을 빼고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제야 나는 아까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단숨에 깨닫고 좀 전의 남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행방을 찾는 와중, 갑자기 그가 방향을 바꿔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뭐라 말할지 생각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는 기회를 놓쳐서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한국말로 말을 걸어야 하나,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으니 영어로 해야 하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다가 일단 말을 내뱉었다.
“호...혹시... 한국인이세요?”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그렇다고 하자, 나는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지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너무 외로워서요... 뭐든 괜찮으니 좀 따라다녀도 될까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 그로선 엄청 당황스러웠을 거다. 그래서 급히 구구절절 이유를 붙였다. 혼자 여행 중인데, 해는 이미 졌고, 버스는 새벽 1시 30분 출발이고, 유로화도 다 떨어져가고...
아마 내 행색도 상당히 설득력을 더해줬을 것인데, 당시의 나는 새벽부터 숙소를 나와 무거운 짐을 하루 종일 지고 다닌 상태인데다, 밤 버스를 타기 위해 렌즈도 빼고 (안 그래도 작은 눈을 더 작게 보이게 하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 덕분인지(?) 그는 곧 경계를 풀었다. 동생과 함께 여행을 왔는데 지금은 숙소에서 함께 저녁 해먹을 재료를 사러 나온 길이란다. 잠깐 짬을 내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중에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가 나의 제안 아니 부탁 아니 호소를 흔쾌히 받아들인 덕분에 나는 마치 브뤼셀에 갓 도착한 사람인 것처럼 그를 따라 (사실은 이미 시간 때우느라 세 번은 넘게 돌아본) 주요 관광명소를 둘러보았고, 그가 친절을 베푼 덕에 와플도 얻어 먹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나란히 서서 밝게 빛나는 브뤼셀 광장의 건물들을 보며, 와플을 먹으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동생과 함께 방학을 맞아 유럽여행을 왔고 유명한 축구 구단이 있는 도시들을 둘러보는 것이 목표라 했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머물고 있던 영국에도 곧 들릴 예정이라는 말에, 나는 와플 값도 할 겸 그가 베푼 친절에 보답도 할 겸 그가 곧 들리게 될 영국의 날씨와 물가에 대해 나름의 조언을 해주기도 했는데 사실 그가 들릴 거라 했던 도시는 내가 살던 뉴캐슬과 거의 반대편에 위치해있었기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이후 우리는 그의 본 목적인 장을 보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숙소에서 그의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 쓸모 있는 장보기 일행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이런 저런 재료를 권유하며 요런 저런 요리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요리에 있어서는 나의 행색이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지조 있게! 원래 생각했던 음식 재료를 택했고, 그렇게 장보기는 끝났다.
모처럼 만난 말동무를 보내기 아쉬웠던 나는 구질구질하게 그가 어디 묵고 있는지 (그래서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수다나 떨며 시간을 때워볼까 생각하며)까지 물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숙소는 지하철을 타고 좀 멀리가야 하는 곳이더라. 그렇게 우리는 (내 편에서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와 함께 보낸 1시간여는 내게 큰 위안이 되기는 해서, 나는 좀 더 홀로 거리를 걸을 용기를 냈고 이후에는 맥도날드에 들어가 샐러드를 시켜놓고 버스 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을 마음의 여유까지 얻었던 걸 보면 대단한 위안이었다.
나중에 유럽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게시판을 통해 그에게 고마움을 표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그저 외롭고 쓸쓸하게만 끝났을 나의 겨울 유럽 홀로 여행이 재밌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4년이 지난 지금도 난 잊지 않고 있다.
그와, 그날 숙소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형을 기다렸을 동생분에게 뒤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