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
파고다 공원의 노인을 상대로 성(性)을 매매하며 살아가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 기술이 좋아 ‘죽여주는 여자’라 불리는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스레 살아가는 송 노인을 손 하나 까딱 못하는 그의 청에 따라 대신 죽여준다.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 것이다.
먹고 살 게 없어 노인을 상대로 성을 파는 소영이나, 사회에서는 물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죽을 날만을 남겨둔 노인들의 무기력한 삶은 그 자체로 소외된 한국 노인들의 현실을 일관성 있게 드러낸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죽여준다’는 표현을 통해 박카스 할머니와 그를 둘러싼 노인의 삶을 적나라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포착해내는 셈이다.
그 미덕이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은 소영이 처음으로 살인을 하는 장면이다. 어느 날, 소영은 한 때 친하게 지냈던 송 노인에게 병문안을 갔다가 그가 가족들로부터 외면 받은 채 죽느니만 못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는 송 노인의 부탁을 받게 된 그녀. 결국엔 다소 얼결에 송 노인의 자살을 돕고 만다.
송 노인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실은 자살을 도왔다기 보다 살인을 했다고까지 말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소영의 삶을 지켜봐온 관객으로선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박카스 할머니로서 마주하는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서 그녀가 느꼈을 법한 일종의 모욕감과 인생의 허망함이 송 노인의 처지와 겹쳐 보였겠구나, 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영은 ‘죽여주는 여자’이지만, 사실상 그녀야 말로 가장 죽어 있는 인물이 되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그 자체로 한 명의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영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배치된 도구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소영이 다른 남자 노인들의 죽음에 나서게 되는 상황이 그렇다. 송 노인의 죽음 이후 소영은 또 다른 남자 재우로부터 자신의 친구를 죽여 달라는 청을 받게 된다. 그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는데, 영화는 소영이 그 대가로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손 쉬운 설명도, 그렇다고 송 노인의 경우에서처럼 재우의 친구에 대해서도 연민과 동정을 느꼈다는 설명도 하지 않음으로써, 큰 반항 없이 살인을 하는 소영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만을 남긴다.
왜 소영은 아무렇지 않게 살인에 나서는 걸까? 왜 재우의 친구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고 소영의 손을 더럽히는 것일까? 그리고 재우는 왜 소영의 살인만 부추기고 자신은 뒤로 빠져버리는 걸까? 소영은 화도 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어지러운 마음이 분노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건, 재우의 죽음에 이르러서다. 어느 날 재우는 소영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소영은 난생 처음 경험해본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 그녀답지 않은 수줍음을 내보이며 즐거워 하지만, 결국 재우가 데이트의 끝에 이르러 꺼내는 이야기는 자신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혼자 죽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고 ‘무서워서’ 옆에 좀 있어달라는 부탁이다. 그냥 옆에 누가 있어주기만 해도 조금은 편히 떠날 수 있을 거라며.
그는 망설이는 소영에게 수면제를 쥐여 주고는 그녀가 그걸 삼키도록 하는데, 그 행동에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견뎌야 할 자신의 외로움만이 진정으로 고귀하고 중요한 문제일 뿐, 소영이 다음날 아침 죽은 그의 모습을 보며 맞닥뜨려야 할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무서움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태도가 엿보인다.
처음에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는 싫고, 자신에게 돈을 받고 성적 욕구를 풀어주는 미천한 여자이니 죽이는 것쯤이야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싶은 건가 싶었다. 같은 하층 노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 노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곧 빗나가고 만다. 영화는 재우를 끝까지 신사로, 그 자신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누군가의 온기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인간적 인물로 그리기 때문이다. 결국 소영만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인간적이고 피상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자신도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절대적인 연민의 정신까지 발휘하는.
자기 대신 손을 더럽혀 달라는 노인들의 부탁에 분노도, 저항도 하지 않고, 결국엔 살인 누명까지 쓴 채 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결국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 그리고 더 나아가 하층 노인의 비참하고 굴욕적인 삶도 적당히 보여주면서, 한 명의 여자이자 엄마로서 모성애와 희생정신도 적당히 보여주는 대단히 기능적인 인물이 되는 셈이다.
물론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그 자체로서 소영이라는 인물의 선택과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해주는 순간들이 있긴 했지만, 끝까지 이어지기엔 온갖 (분노를 품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모든 영화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관객으로선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지켜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메시지를 전달받고 싶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소영이라는 인물보단 메시지가 불쑥 튀어나오는 느낌.
‘죽여주는 여자’가 아닌 살아있는 여자 소영을 보고 싶다.